경성 출신 부모님을 둔 마츠오카 씨와의 인연

  • 등록 2022.06.29 11: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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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산맥> 여름호(2022년, 제40호)에서 만난 일본인
<맛있는 일본이야기 65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토요일(6월 26일),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서예가 다나카 유운(1957~2018) 씨의 유품전 개막식을 통해 여러 좋은 분들을 만났다. 특히 허선주, 허봉희, 민아리 님과는 시낭독을 함께 했으며 개막식을 마치고 뒤풀이에 가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친목을 다졌다. 이날 멀리 대전에서 올라온 남상숙 님도 좋은 벗으로 기억된다. 이분들은 '창작산맥' 회원들로 헤어지면서 내게 <창작산맥> 여름호(2022년, 제40호)를 선물했다. 집에 가지고 와서 읽다가 반가운 이름이 있어 눈이 번쩍 떠졌다. 마츠오카 미도리 (p158~164) 씨와 다음 쪽에 연이어 나오는 야나기하라 야스코 (p165~175) 씨가 그들이다.

 

 

 

오늘은 “어머니의 무언의 가르침”을 쓴 마츠오카 미도리 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마츠오카 미도리 씨를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2018년 2월 18일, 윤동주 추모회 때 함께 시낭송을 했을 때다. 성우라는 직업을 가져서인지 당시 마츠오카 씨의 시낭송은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마츠오카 씨의 부모님이 경성(서울)에서 출생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태어난 곳이 용산 철도병원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나 역시 철도병원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한 여자아이는 당시 다카다노바바에서 신오쿠보로 향하는 선로를 따라 늘어선 판잣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곳은 조선사람들이 폐품 회수를 생업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라고 했는데 지금 신주쿠의 신오쿠보 지역은 도쿄 코리아타운 지역으로 변모해 있다.

 

마츠오카 씨의 친정 아버지가 다니던 와세다대학에 연구원으로 가 있던 나는 마츠오카 씨가 말하던 신오쿠보에서 걸어서 다카다노바바까지 그리고 거기서 와세다대학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다.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마츠오카 씨의 아버지가 거닐던 캠퍼스에서 같은 배움을 이어갔던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자신(친정어머니)이 태어나기 13년 전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사실, 또 자기 나라인 줄 알았던 곳이 조선사람들의 나라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것,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은 지켜져야 되고 또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니는 항상 일깨워 주셨다.” 마츠오카 씨 친정어머니의 ‘조선 체험’이 훗날 딸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교과서에서조차 ‘조선침략은 없었다. 침략이 다 무엇이냐? 조선의 근대화를 시켜준게 일본이 아니더냐’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일본의 왜곡된 교육관에서 벗어나 마츠오카 씨가 일제의 조선침략을 직시하게 만든 것이 경성 출신의 부모님 덕이라니, 새삼 놀랍다. 보고 배우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분명 마츠오카 씨는 ‘차별을 하고도 그것의 해악을 모르는 일본사회의 우경화’ 틀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이요, 평등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시로써 평등과 자유를 노래했듯이 다나카 유운이 그 뒤를 따르고 있고, 다시 그 뒤를 우리들이 따르고 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억압과 차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세상이다.

 

2012년 12월, 추운 날씨 속에 들렸던 서울역(경성역)에서 마츠오카 씨는 당시 이 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갔을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당시 17살이었던 1934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어머니 역시 17살이었던 1940년에 각각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경성역을 이용했다. 부모님은 가고, 덩그러니 마츠오카 씨 홀로 남겨져 그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그려진다. 당시에 마츠오카 씨가 지은 시 한 수를 감상해보자.

 

“부모님이 느껴지는 추운 밤의 서울역”

(考妣ゐし気配寒夜のソウル駅):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

 

“어느 날 아침, 부모님과 시어머니, 시동생 등 네 명의 영정과 마주쳤을 때 문득 네 명이 모두 전쟁 전 한반도 경성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게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라고 마츠오카 씨는 고백한다. 태어났던 곳이 뭐 대수롭냐 싶지만,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 가운데는 ‘조선땅을 그리워 하는 이’들이 뜻밖에 많다.

 

아베 다케시(阿部建, 1933~2018) 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33년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조부모를 비롯하여 일가(一家) 40명이 조선에서 나고 죽었다. 그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아베 다케시 씨는 고향 청진을 무대로 한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중천의 반달(中天の半月)》을 쓰고 타계했다.

 

 

아베 다케시 씨는 마츠오카 씨의 친정 엄마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조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조선어를 한마디도 몰랐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는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어를 전혀 배울 필요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어를 몰라도 현지 생활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조선어 존재를 무시해도 생활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 보니 조선인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내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베 다케시 씨는 이후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한국의 역사에 대해 엄청난 학구열을 보였다.  아베 다케시 씨 같은 이야기는 고향이 조선이었던 일본인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지인인 마츠오카 미도리 씨 부모님이 경성 출신이라는 것, 내가 살던 용산 철도병원 근처에서 사셨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마츠오카 씨고, 그녀가 신주쿠의 신오쿠보와 다카다노바바 언저리에서 살았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고 나 역시 그곳에 연구원으로 가 있었을 때 신오쿠보와 다카다노바바를 수없이 걸어다녔다는 것 등등 인연치고는 너무나도 깊은 인연이다.

 

 

코로나19가 끝나서 마츠오카 미도리 씨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싶다. <창작산맥> 덕에 아니, 윤동주를 사랑한 다나카 유운 씨의 유품전 개막식 덕에, 더 나아가 허선주, 허봉희, 민아리 님을 만난 덕에, 지인 마츠오카 미도리 씨의 글을 접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대단한 인연이 아닐까한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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