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 정의공주

2024.05.06 11:36:47

《정의공주》, 글 박연아, 그림 오렌지툰, 동네스케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57)

“네가 들려준 소리들이 우리글을 만드는 데 크게 쓰였다. 아비의 마음 같아서는 온 백성들이 나의 딸이 함께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정의는 또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했단다.”

“아바마마….”

“세상에 너의 공을 알리지 못함이 속상하지는 않더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아바마마께서 직접 만드시고 이룩해내신 크나큰 업적이옵니다. 저는 다만 미력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한글은 참 쉽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혀 금방 ‘까막눈’을 면할 수 있다. 글자를 모르고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한 임금, 세종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집현전 학사나 신하들의 도움 없이 해낼 수 있었을까?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였다. 나빠진 건강을 이유로 세자였던 문종에게 정무를 맡기고, 본인은 본격적으로 문자 연구에 매달렸다. 이때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딸 정의공주였다.

 

박연아가 쓴 이 책, 《정의공주》는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신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의공주의 일생을 다룬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이었다. 첫째딸 정소공주가 열셋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허전했던 세종 부부의 마음을 달래준 귀한 공주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정의공주는 안맹담과 혼인하여 사가로 나간 뒤에도 아버지가 맡긴 일을 정성껏 도왔다. 아버지가 우리의 소리를 우리의 글자로 만드는 데 매진하고 있고, 그것이 조선의 뿌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p.107-108)

“아가… 정의야. 시집을 가더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말거라. 이 아비는 우리의 소리를 우리의 글자로 만드는 데 매진하고 있단다. 그것이 바로 이 조선의 뿌리기 때문이다. 정의 너는 그 뿌리를 늘 상기하며 공부하기를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이 아비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그리 해줄 수 있겠지?”

정의는 궁이 있는 곳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왜 아니겠습니까. 한시도 아바마마의 뜻하신 바를 잊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정의공주는 집안일이 바쁜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뜻을 이루는 데 힘을 보태고자 백성들의 소리를 모았다. 지역마다 다른 사투리를 모두 모아 따로 분리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연구했다. 이런 소리를 빠짐없이 모아 소리마다 가지는 특징과 뜻을 구분해 냈다. 정의공주의 이런 노력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공적 영역에 있는 신하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반대가 들불처럼 일어나 훈민정음을 반포도 하기 전에 뜻이 꺾일 수 있었기에, 세종이 의지했던 이들은 주로 가족이었다.

 

(p.131)

세종은 수시로 공주와 대군들을 불러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연구하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글자를 말한다.

“어허…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했으니.”

그때 막 정의공주가 낙천정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줄임)... 세종의 정의공주에게 낸 숙제는 변음과 토착음(민간용어 또는 사투리)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끝내지 못해 대군들에게 풀라 하였으나 모두 이를 풀어내지 못하여 결국 정의공주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정의공주가 이를 풀어낸 것이다.

 

 

마침내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알렸다. 세종이 워낙 극비리에 일을 추진했기에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깜짝 놀랐다. 세종의 직속 연구기관이었던 집현전 학사들조차 몰랐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난 문자’였다.

 

집현전 학사들만큼은 본인의 뜻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던 세종의 기대와 반대로, 생각보다 많은 집현전 학자들이 강경히 반대하고 나섰다. 집현전의 모든 학자가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해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등의 반대가 심했다.

 

세종은 깊은 분노를 느꼈다. 한글을 창제한 근본 목적을 정면에서 반박하며 중국의 것만 옳다 고집하다니, 학문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어찌 이리도 편협하며, 이들이 진정 집현전의 학사들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배신감은 컸다.

 

그리하여 최만리, 정창손, 김문 등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던 이들은 모두 관직에서 파직되고 김문은 장 100대에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세종은 당대 으뜸 학자라 불리던 최만리가 올린 사직 상소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붙잡지 않았다. 최만리는 그길로 낙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듯 세종이 무수한 반대를 뚫고 세상에 내놓은 글자, 훈민정음은 많은 고난과 부침을 겪으면서도 우리 문화의 바탕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했다. 한글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우리 소리가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훈민정음으로 쓴 첫 책인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대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내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간다.

 

세종대왕과 아버지의 뜻을 도운 정의공주, 그리고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 땅에 많은 꽃과 열매가 피었다. 다가오는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자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한글’이라는 영원한 선물을 안겨준 겨레의 큰 스승, 세종대왕의 탄신과 함께 한글의 탄생도 되새겨보면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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