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통6년’ 글씨 새겨진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쇠북

2024.05.06 1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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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쇠북[金鼓]의 기원

 

절에서 의례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쇠북은 원래 전장(戰場)에서 사용된 악기의 일종이었습니다. 《사기(史記)》, 《손자(孫子)》,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쇠북이 전장에서 사용된 징과 북이라고 기록고 있어, 원래는 전쟁에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쇠북이 불교에서 의식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8세기로 추정됩니다. 당대(唐代) 의정(義淨, 635~713)이 703년에 한역(漢譯)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3 「몽견금고참회품(夢見金鼓懺悔品)」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됩니다.

 

“그때 묘당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묘한 법을 친히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꿈속에서 큰 금북[金鼓]을 보았는데, 광명이 환하게 빛나기가 마치 해와 같았다. 이 광명 가운데서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보배로 된 나무 아래 수정으로 만든 평상에 앉으시어 한량없는 백천 대중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위해 법문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어떤 바라문 한 사람이 북채로 금북을 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소리 가운데서 미묘한 가타(伽他, 부처의 공덕ㆍ교리를 찬미하는 노래 글귀)를 읊으며 참회하는 법을 밝혔다.”

 

이 경전의 내용에 따라 불교에서 쇠북을 의식구로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흥복사(興福寺)의 《흥복사자재장(興福寺資財帳, 흥복사의 재물을 기록한 장부)》 「보자기(寶字記)」 서금당조(西金堂條)에는 당에서 전래한 화원경(華原磬)에 대해 “金鼓一具 高拜臺三尺五寸五分 鼓徑七寸八分 長二尺三寸九分 廣二尺三寸七分 左婆羅門形一人 持槌…”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화원경이 금고(金鼓)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높이 3척(약 90㎝)의 바라문(인도에서 가장 지위가 높던 승려 계급)이 당목(撞木, 절에서 종이나 징을 치는 나무 막대)으로 금고를 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금광명최승왕경》의 내용과 일치하여 화원경은 《금광명최승왕경》의 금고를 형상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쇠북의 전래 기록은 없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는 문수대성(文殊大聖)이 36종으로 변신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금고형(金鼓形)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산오만진신조에는 신룡(神龍) 원년(705)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경우 705년에는 금고, 곧 쇠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팔공산 동화사에는 842년에 쇠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초반에 쇠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과 다르게 실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쇠북은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907호)로 지정된 “咸通陸歲乙酉(함통육세을유)”이란 글씨가 새겨진 쇠북(아래 ‘함통6년글씨 쇠북’)입니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쇠북

 

보물 ‘함통6년글씨’ 쇠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쇠북입니다. 기록상의 8세기 쇠북이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함통6년글씨’ 쇠북은 우리나라 쇠북의 시작으로 간주할 만합니다. 이 쇠북의 앞면은 소리를 내는 고면(鼓面)으로 2줄의 돌출한 동심원을 둘렀고 당좌구, 중구, 외구의 3개 공간으로 구분됩니다. 뒷면은 넓은 공명구를 이룹니다. 옆면은 가운데의 도드라진 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며, 오각형의 고리는 위로부터 90° 간격으로 3개가 달려 있습니다. 옆면의 공명구 쪽으로는 글씨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쇠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무 무늬 없이 고면을 3개의 공간으로 나눈 것입니다. 대부분의 쇠북은 고면 중앙 당좌구에 연꽃무늬를 표현하고 바깥쪽에 구름무늬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쇠북은 고면을 여백으로 두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2009년 군위 인각사(麟角寺) 터[에서 출토된 쇠북에서도 확인됩니다. 10세기 작품으로 추정하는 인각사 터 출토 쇠북에도 고면에 아무 무늬가 없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쇠북은 ‘함통6년글씨’ 쇠북을 시작으로 10세기 인각사 터 출토 쇠북에 이르기까지 무늬 없는 고면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쇠북에 새겨진 글씨

 

이 쇠북의 옆면 공명구 쪽으로는 양각으로 좌서(左書, 오른쪽과 왼쪽이 바뀐 것)된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咸通陸歲乙酉二月十二日成內月(?)供寺禁口”

 

글씨에 따르면, 이 쇠북은 함통6년 을유년인 865년 2월 12일에 만든 금구(禁口)입니다. 흔히 쇠북을 금고라고 부르는데, 이 쇠북의 명문에는 “禁口”로 기록되어 당시에는 쇠북을 ‘금구’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쇠북의 글씨에서 봉안했던 절 이름은 명확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명문의 “成內月(?)供寺”를 절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에 공양한 때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內” 다음 글자는 “月”을 부수로 하는 글자로 판단되어 절 이름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

 

 

‘함통6년글씨’ 쇠북에는 고려시대 쇠북처럼 연꽃이나 구름과 같은 무늬가 표현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쇠북의 시원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인각사터에서 출토된 쇠북으로 보아 10세기까지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용진) 제공

 

 

한성훈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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