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편지 206] 민족의 문화유산 <홍범도 일지>에 대한 상념 -정철훈-

2015.02.03 07:07:2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868년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 일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젖 : 필자)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양 중국의 보단(步段)으로 호병정(胡兵丁) 설(設)할 때 우영(右營) 제 일대대에서 코코수(나팔수:필자)로 사연을 있다가(복무하다가: 필자)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 종이뜨는 지막 제지소에 와서 종이뜨기를 배워 삼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丙戌:1886년) 정해(丁亥:1887년)쯤 되었다.”(홍범도 일지-리함덕 등사본)

연해주 협동농장에서 일하던1929년 재혼한 부인 이인복과 손녀의 모습

  내가 <홍범도 일지>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1993년 여름, 모스크바에서입니다. 모스크바 세레메치예보 공항 가는 방향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던 작가 김세일(세르게이 표도르비치)는 나에게 서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홍범도 일지>를 가져와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지금은 시대가 좋아 복사기가 있지만 나는 1950년 대 중반. 이 일지를 고려인 노(老)혁명가 리인섭 선생에게 빌려 한 자 한 자 손으로 베껴 썼지요.”

  김세일 선생이 내게 보여준 <일지>는 리함덕 등사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지>에 앞서 나의 잠재된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1989년 국내에 소개된 홍범도 사진입니다.

  ‘1929년 항가 호숫가에서 찍은 홍범도와 그의 부인 리인복, 가운데 아이는 새 부인의 손녀로 이름이 예까쩨리나이다’라는 설명이 붙은 이 사진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인 헬싱키 대학의 고송무 교수가 1990년 국내에서 출간한 저서 <쏘련의 한인들>에 수록된 것이었습니다.

 1920년 치러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홍범도 장군이 9년 후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항가 호숫가에서 새로 맞이한 부인과 어떤 경위를 거쳐 이 사진을 찍었으며 사진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라는 의문과 동시에 내 관심을 끈 것은 평범한 농사꾼의 얼굴을 한 홍범도 장군의 친근한 인상과 허리춤에 찬 권총이었지요. 이 권총이 1921년 레닌을 만났을 때 받았다는 은제 권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며 꽃가지를 손에 꺾어든 새 부인과 손녀에게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었지요. 짐작컨대 이 꽃은 홍범도 자신이 사진을 찍기 전, 항가 호숫가에서 꺾어 새 부인과 손녀의 손에 쥐어 주었을 겁니다.

  ‘권총과 꽃’이라는 이미지는 전쟁과 평화만큼이나 대조적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홍범도 장군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희생해가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실현에 몰두하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사진이지요. 나는 홍범도 장군의 비범함이 이 대조적인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은 저항과 복수와 전쟁의 상징이지만 꽃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평화의 상징이지요.

  <홍범도 일지>는 그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뒤 1938년 후반기에서 40년 사이의 어느 때에 고려극장의 희곡작가 태장춘의 권유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일지>에 따르면 홍범도는 37년 연해주를 떠나 그해 11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야니쿠르간 사나리크촌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5월 중순 크질오르다로 다시 이주했는데 그에게 주어진 연금은 생활하기에 충분치 않았답니다. 마침 크질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총연출가 겸 희곡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의 주선으로 극장의 수위장을 맡아 보게 되었지요. 홍범도는 이를 계기로 매월 80루블의 연금 외에 따로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제법 넉넉한 삶을 영위했고 태장춘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답니다. 홍범도는 자신의 항일무장투쟁활동을 메모 식으로 기록한 '목필책'을 갖고 있었고, 이를 기초로 태장춘이 자신의 아내 리함덕에게 홍범도의 구술 증언을 받게 하여 정리한 것이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홍범도 일지>의 원형이지요.

  태장춘은 이 <일지>를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완성했고 1941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채영 연출로 <홍범도>가 공연되었지요. 연극을 직접 관람한 홍범도는 소감을 묻는 고려극장 배우들에게 “나를 너무 추켜올렸다”며 계면쩍어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그의 인간적 체취를 맡을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극장의 배우이자 당서기의 책임을 맡았던 김진이 우즈베키스탄 안지잔에 거주하고 있던 항일혁명가 리인섭의 부탁을 받고 58년 4월16일 <일지>를 등서하여 리인섭에게 전달하였지요. 리인섭은 항일혁명가들의 회상기를 수집하고 홍범도,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의 전기 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리인섭은 김진이 보내준 <홍범도 일지>를 깔끔하게 정리해 <저명한 조선의병대장 홍범도 수기>라는 제목을 붙였답니다.

  하지만 <일지>의 원본은 1965년을 전후한 시기에 애석하게도 소실(消失)되고 말았답니다. 리함덕 여사 혹은 홍범도의 부인 리인복 여사가 <일지> 원본이 들어 있는 옷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빨래를 함으로써 원본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다만 다행스럽게도 리인섭이 원본 훼손 전에 베껴 쓴 등사본(騰寫本)이 남아 있어서 홍범도의 생애와 행적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리인섭은 1959년 여름, 리인섭이 홍범도 전기의 집필을 부탁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김세일을 방문하면서 <일지> 등사본을 전달했고 김세일은 리인섭으로부터 전달 받은 여러 자료들을 기초로 <레닌기치>에 소설 <홍범도>를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이죠.

  홍범도가 직접 기록한 '목필책'과 리함덕이 구술 정리한 <일지>, 그리고 김진이 리인섭에게 보낸 필사본은 애석하게도 오랜 세월 속에 분실되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 리인섭의 딸 리라이야가 보관해 오던 <일지>가 최근 국내 입수되어 김세일 필사본과 대조한 결과, 김세일 필사본은 오자와 탈자가 많은 것은 물론 첨삭된 부분이 확인되었답니다. 무엇보다도 김세일 필사본의 가장 큰 오류는 <일지> 맨 끝에 적힌 서명의 오기이지요. 김세일은 <일지>를 제공한 리인섭 필사본의 서명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함덕의 서명으로 적어넣었지요. 아마도 김세일은 <일지>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리인섭 필사본을 등사했으면서도 리함덕 필사본으로 위장하려고 그런 서명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홍범도 자신은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지요. 그래서 리인섭 필사본에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이 눈에 띄고 함경도 지방의 방언이나 속어, 틀린 용어나 한자어 등도 상당수 발견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런 점이 <일지>가 갖는 사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서투르고 때로는 어눌하기도 한 어투 그대로 씌여진 <일지>는 홍범도 장군의 어투나 육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한민족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홍범도의 육성 DNA가 묻어 있는 <일지>를 소리 내어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정 철 훈  

시인·소설가·
전 언론인·한국근대문화연구소 대표 연구원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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