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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선 교수의 행복 메시지

나는 흙수저를 가졌기에 서울대에 합격했다

[최운선 교수의 행복메시지 8]

[우리문화신문=최운선 교수] 중국 대륙에는 큰 강이 두 개가 있다. 북쪽에는 황하, 남쪽에는 양자강이다. 양자강 유역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농사짓기에 알맞으나 황하유역은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되풀이되고 메뚜기 떼의 피해가 극심하여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양자강이 아니고 황하유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농경조건이 나쁜 황하유역에서 먼저 문명이 발달하였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한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 같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도전과 대응”의 관계가 문명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 예가 바로 양자강유역의 사람들은 농사짓는 환경과 조건이 좋고 자연에 도전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이 생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하유역 사람들은 홍수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로를 만들고 관개토목 사업을 하였고, 가뭄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상관측소를 설치하였으며 기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는 등 자신들이 처한 불행에 늘 도전하여 새로운 문명이 발전하게 되는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에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라인강의 기적이나 한강의 기적도 전쟁의 폐허라는 불행에 대한 도전으로 복구와 건설이라는 대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다른 예로 부존자원이 풍부한 브라질이나 인도보다도 부존자원이 척박한 영국이나 일본이 더 선진부국이 된 것도 생각해보면 도전과 대응의 원리와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이룩해 낸 문명은 자연의 혜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악조건과 끊임없이 싸워서 이룩해 낸 결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행에 대한 도전과 대응의 원리는 한 나라의 역사발전 법칙일 뿐만 아니라 한 회사나 한 가정 그리고 한 개인의 성장 발전에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고, 금수저를 지녔다는 재물을 가진 자는 태만하기 쉬우며, 월계관을 쓴 승자는 자만하기 쉽기 때문에 현실에서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흙수저를 지녔다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실패한 사람들은 와신상담 도전에 대응하므로써 성공의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위인들 대개가 넉넉지 못한 환경의 성장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스스로 극복하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들 스스로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탓하거나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특히 흙수저를 지녔다고 자신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불행에 대한 도전을 대응의 기회로 삼는 의지와 용기가 오히려 성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서울대에 합격한 어느 소아마비 학생의 수기글이 생각난다.

 

   
▲ 흙수저를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했기에 서울대에 합격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학원에서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무료로 강의를 들었다. 학원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쳐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 가게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쥐꼬리만 한 몇 푼의 월급으로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계셨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 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우고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나는 흰 연습장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제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전 당선작>

소아마비 학생의 생활수기 글을 통해 우리는 금수저ㆍ흙수저를 탓하기 전에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 금수저를 갖게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