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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군마현 광은사서 만난 일본 최초 승정 고구려 혜관스님

광은사(光恩寺) 주직 나가라쿄코 스님과의 대담

[우리문화신문=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 이윤옥 기자]


“1월 1일 오후 3시에 오시면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에 자리한 광은사(光恩寺, 고온지) 주지스님은 서울에서 누리편지(메일)를 보낸 기자에게 시간까지 정해주면서 찾아오라고 했다. 1월 1일은 일본 절에서 새해맞이(初詣, 하츠모우데) 로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때로 외부 손님과의 대담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스님은 흔쾌히 기자와의 약속을 해주었다.




광은사는 고구려 혜관스님이 개산(開山, 산문을 연다는 뜻으로 창건을 뜻함)한 절로 이카호의 수택사(미즈사와데라, 水澤寺), 이바라기현의 근본사(根本寺, 곤본지)와 함께 관동 지역의 3대 고찰 가운데 하나인 천년 고찰이다.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주지스님을 찾아뵙겠다고 한 것이 죄송스런 일이긴 하지만 기자 역시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이 이때뿐인지라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낸 것이 가상했는지 광은사의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3시에 기자를 맞았다.


팔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모습의 주지스님은 검은 옷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기자를 만나자 마자 명함을 건네주었는데 광은사주직(光恩寺住職) 나가라쿄코(長柄行光)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례지만 연세는? 이라고 물으니 웃으면서 "아가씨 나이와 스님 나이는 묻지 않은 거랍니다."라고 재치 있게 질문을 피해갔다.




통성명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고구려 혜관스님의 기록을 좀 보여주십시오." 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미리 준비했다는 듯 커다란 종이 가방에서 광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내보였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내더니 이내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돋보기도 없이 깨알 같은 글씨를 줄줄 읽어 내려갔다.


"이 절은 광사(光寺) 또는 광은사(光恩寺)라 불렸으며 서기 625년(推古帝23年) 고구려승 혜관이 개산하였다. 처음에는 혜관의 삼론종(三論宗)을 받들었으나 809년(大同4年) 쿠우카이(空海)스님이 밀종(密宗)으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군마현읍락군지(軍馬縣邑樂郡誌)》, 군마현읍락군교육회(軍馬縣邑樂郡敎育會) 펴냄, 1918년, 310쪽-


스님은 마치 오랜 세월 기자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고구려 혜관스님 관련 자료를 이것저것 꺼내 설명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었다.


"광은사 뒤편 곧 종루(鐘樓)가 있는 그 자리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서기 3~6세기 일본의 고분시대 무덤으로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무덤 양식)입니다. 그곳에 묻힌 이는 나가라씨(長柄氏)로 당시 나가라씨족(長柄氏族)들은 이 일대의 유력한 호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 아카이와(赤岩)에 절을 짓고 당시 조정에서 승정으로 이름을 떨친 혜관스님을 초청하게 된 것입니다." 주지스님은 마치 누에고치 실타래를 풀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나라(奈良)의 조정에서 잘 나가던 혜관스님이 멀고도 먼 관동의 군마현까지 발걸음을 하기가 쉬웠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군마현에 귀화인(歸化人, 이 말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일컫던 말로 지금은 도래인(渡來人)이라 부르지만 주지스님은 귀화인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곳에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것과 혜관스님의 관동 진출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스님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스승인 호소야세키치(細谷淸吉)의 《고대읍락정관음영장(古代邑樂町觀音靈場)》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면서 책 한 권을 선물했다.  호소야세키치 선생의 책 22쪽에서 24쪽에는 <나가라씨와 광은사(長柄氏と光恩寺)> 편이 있는데 이곳에 혜관스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 보면 추고왕 33년(625)에 고구려에서 혜관이 건너왔다. 혜관은 수나라에서 삼론종의 대가인 가상대사에게 삼론을 익히고 일본에 와서 삼론의 개조가 되었다. 나라의 원흥사(元興寺, 간고지)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 국가에 큰가뭄이 들어 조정에서 혜관스님에게 기우제를 청했다. 혜관스님은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였는데 돌연 큰비가 내렸다. 조정에서는 매우 기뻐하며 혜관을 승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승정 기록이다. 혜관은 627년에 무츠지방(陸奥国, 현재의 아오모리 일대)에서 괴물퇴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 관동으로 와서 광은사(光恩寺,고온지), 수택사(미즈사와데라, 水澤寺), 근본사(根本寺, 곤본지) 도량을 열었다."


호소야세키치 선생의 해설은 명쾌했다. 이러한 기록은 호소야 선생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기록된 혜관승정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면담 시간을 30분 정도로 잡고 3시에 만난 주지스님과의 대화는 고구려 혜관스님의 이야기에 빠진 주지스님의 설명에 그만 예정시간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긴 4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대담만 끝났을 뿐 스님은 한 시간 반 동안 들려준 이야기가 적혀 있는 각종 자료를 복사해주겠다며 노구를 이끌고 복사실로 향했다.


스님이 복사물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기자는 동석한 치요다쵸 구청 공무원인 고바야시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고바야시 씨는 치요다쵸(千代田町) 경제과상공통계계(經濟課商工統計係) 직원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광은사로 가는 교통이 아주 불편한 관계로 주지스님이 고바야시 씨에게 기자를 부탁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으로 떠나기 전 광은사 주지의 부탁을 받았다는 고바야시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광은사로 가는 교통편을 제공하겠다"라는 메일을 받았으나 길 찾기엔 자신이 있었을 뿐 아니라 공연히 신세지기가 싫어 "괜찮다, 혼자 찾아가겠다."라는 말로 정중히 고마움만 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뿔사! 광은사로 떠나기 전날 오오타(太田)의 숙소에서 종업원에게 광은사 길을 물으니 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곳이라 2시간 가까이 걷거나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택시도 흔치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서야 주지스님의 친절한 배려가 생각났다. 그러나 기자를 돕겠다는 구청 직원에게 이미 괜찮다는 메일을 보내 둔 터였기에 나는 몹시 난처했다.


길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2시간 가까이 걷는다는 것도 그렇고 콜택시를 부를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낙담을 하면서 혹시 싶어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메일을 보니 한통의 메일이 다시 와 있었다. 구청직원 고바야시 씨 였다. "아무래도 광은사 가시는 길이 걱정되어 제가 호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라는 메일이 왔었던 것이다. 너무나 기뻤다.




광은사로 떠나는 날 오전 11시, 고바야시 씨는 18개월 된 아들과 남편까지 태우고 오오타의 토요코인까지 와주었다. 친정에 가는 길에 나를 광은사에 데려다 주고 다시 주지스님과의 대담이 끝나면 호텔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을에 타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이 정도 편의는 되레 자신들이 고맙다는 것이었다.  설연휴임에도 기자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그저 고마웠다.  호텔에서 광은사까지 승용차로는 30분이 채 안되는 거리였다. 막상 도착해보니 승용차가 아니면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한적한 시골 마을 안에 광은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주지와의 면담이 3시이었기에 나는 일찌감치 가서 절도 구경하고 주변에서 점심도 먹고 기념품가게 구경도 할 생각으로 고바야시 씨를 11시까지 와달라고 한 것이 문제였다. 11시반 광은사에 도착하고 보니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광은사 주변에는 음식점은 고사하고 흔하디흔한 편의점 하나 없었다. 절 앞에 초밥집이 딱 하나 있었는데 정월초하루(일본은 양력설)라 문을 닫았다. 작은 규모의 광은사는 절집에서 점심 공양을 준다든지 하는 일도 없었다. 밥은 고사하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곳도 없어 나는 하릴없이 절 주변을 서성이며 3시간을 무료하게 주지스님을 기다려야했다.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어 뜻밖의 자료를 손에 쥐고 나니 점심도 굶고 3시간이나 고생한 일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관동 굴지의 천년고찰 광은사는 과거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를 거듭하여 현재의 본당은 명치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절의 규모는 고구려 혜관스님 당시의 규모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쇠락해 있었다. 가람 건물이 즈믄해(천년) 동안 지속되기란 어려운 법임을 광은사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대신 광은사에는 절 경내의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귀한 유물들이 보존되고 있다.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금붙이 등 귀한 것은 막부(에도막부)에 모두 빼앗기고 잔챙이만 우리 절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매우 소중한 것으로 얼마 전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스님은 바로 지난해 2016년 '다카사키시 관음총 고고자료관'에서 열린 <전방후원분이 사라질 때(前方後圓墳が消えるとき)>라는 제목의 전시책자를 한 권 선물로 주면서 광은사의 유물이 실린 13쪽 부분을 펴 보여주었다.



13쪽에는, 아까이와당산고분(赤岩堂山古墳) 출토에 대한 자세한 경위와 출토품이 컬러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광은사 경내에 있는 전방후원분은 전장길이 90m, 후원부지름 48m, 높이6m, 전방부폭 72m, 높이 7.5m다. (중간 줄임) 이 고분은 에도시대에 발굴되어 당시에 출토된 유물은 직도(直刀), 철제도장구(鐵製刀裝具), 금동장두추대도(金銅裝頭椎大刀) ....등이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7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좀 장황하지만 이것을 인용한 것은 전방후원분에 묻힌 호족과 고구려 혜관스님과 관련이 있음을 이미 호소야세키치 선생의 책에서 밝힌 바 있기에 조금 맛보기로 소개한 것이다.


한편, 주지스님이 건네준 복사물 가운데 눈에 띄는 한 가지가 또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군마현읍락군지(軍馬縣邑樂郡誌)》317쪽의 <광은사 보물> 목록이다. 이 목록에는 절에 내려오는 제례용 방울 등을 포함한 목록이 다수 적혀 있었는데 '신라마힐경권중 (新羅摩詰經卷中)1축' 이라는 목록이 기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신라의 유마힐경으로 상중하 가운데 중권이 이 절에 내려오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주지스님이 복사된 자료를 건네줄 때는 미처 시간이 없어 찬찬이 보지 못하고 숙소에 와서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스님에게 질의를 해볼 참이다.


"저는 요새 고구려 주몽을 즐겨 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주지스님은 한국의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기자는 드라마 주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맞장구를 쳐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시간여 대담을 하면서 나가라쿄코 주지스님의 해박한 역사의식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실 군마현은 고대 귀화인(고대한국인을 뜻함)들이 와서 일군 땅입니다. 당시에는 일본내에서도 최첨단 문화집단이었죠. 적어도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명치 이전만 해도 군마지역은 대단한 문화적 자존심을 간직한 곳입니다. 군마(群馬)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일본 지명에 말(馬)자가 들어가는 곳은 군마가 유일합니다. 말(馬)이 무리(群)를 지어 사는 곳이란 권력을 뜻하는 것이며 기마민족들이 자리한 터전이란 뜻이지요." 주지스님은 기마민족이 곧 고구려민족이라고 믿고 있었다. 요약하면 군마 곧 고구려라는 등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시간 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광은사에서 기자는 무려 3시간 이상 광은사 주변을 맴돌았다. 하늘은 마치 천고마비의 계절처럼 푸르고 높았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소읍에 지나지 않아 자력으로는 찾기도 어려운 절 광은사지만, 고구려 혜관스님이 이곳 아카야마잔(赤岩山)에 개산(開山)할 무렵에는 손꼽히는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내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조금 지나 절 밖으로 나가보면 광활한 들판이 펼쳐진다. 어쩜 저 너른 들판도 9개의 말사를 거느렸던 광은사 경내였을지 모른다.



1300여 년 전 혜관스님도 나처럼 이 자리에 서서 저 너른 들판을 바라다보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때는 들판 가득히 가람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초대승정으로 이곳 군마땅에 와서 불법(佛法)을 널리 펴면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스님의 후예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고구려 혜관스님의 유서깊은 절 광은사(光恩寺, 고온지) 가는 길

   * 주소: 群馬県邑楽郡千代田町赤岩1041

   * 전화: 0276-86-2157

   * 가는 길: 기자는 광은사를 가기 위해 비교적 접근이 편한 군마현(群馬県) 오오타(太田)역 주변의 토요코인(群馬県太田市飯田町1320-1)에 묵었다. 그러나 광은사까지 가는 차편이 안 좋아 광은사 주지스님으로부터 교통편의를 제공받아 승용차로 30분 거리의 광은사를 편하게 다녀왔다.


참고로 <야후재팬>의 지도에서 안내하는 길을 소개해둔다. 오오타(太田)역에서 덴챠(電車)를 타고  1개역을 지나 도후쿠고이즈미선(東武小泉線) 히가시고이즈미행(東小泉行)으로 갈아 탄뒤 히가시고이즈미(東小泉)에서 하차하여 광은사까지 약 1시간 24분 걷는다. 현지에 가는 경우에는 반드시 각 역의 안내에서 자세한 길을 묻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