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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1300년의 고구려 역사를 간직한 사이타마 고마신사를 가다

고마신사(高麗神社) 제60대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씨와 특별대담

[우리문화신문= 일본 사이타마 이윤옥 기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신사(神社) 경영이 어려워 아버지는 교사 직업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게 1975년 무렵입니다. 이후 아버지는 교직을 사직하고 궁사(司宮, 구우지) 일에만 전념하게 되지요. 여러분이 고마역(高麗驛, 고구려를 고마라고 발음)에 내렸을 때 광장에 빨간 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거기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쓴 것은 아버지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쓴 글씨는 아닐 겁니다. 병환 중에 쓰신 글씨였거든요."



고마신사(高麗神社, 고마진자)의 제60대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씨는 대담을 위해 찾아간 기자 일행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장승에 새겨진 글씨가 아버님의 글씨라고요? 아이고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보고 올 것을 그랬네요" 일행은 고마역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글씨가 누구의 글씨인지 몰랐다.


15일(일) 오전 11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埼玉県日高市)에 자리한 고마신사의 접견실에서는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 4명과 일본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도다 미쓰코(戶田光子) 씨 등 일본이 3명이 1시간 가까이 궁사(宮司)와 환담 시간을 가졌다. 고마신사를 찾은 이날은 정초 신사참배 기간이라 궁사와의 면담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였으나 특별히 방문한 한국의 기자 일행을 위해 궁사는 기꺼이 장시간의 면담시간을 내주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궁사(宮司, 신사의 우두머리)는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로 기자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때 혹시 고마(高麗)라는 이름 때문에 신사의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지는 않았는지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궁사는 "그렇지는 않았다"라고 답했다.


사실 기자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카나가와현 오이소 (神奈川県大磯)에 있던 고마신사(高麗神社)는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이름을 바꾸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1871年(명치 4년) 1월 5일 명치정부는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를 통해 폐불훼석(廢佛毁釋, 하이부츠키샤쿠)을 단행하여 전국 사찰의 간판을 내리게 하고 신사(神社)를 장려하였다.


*참고로 카나가와현 오이소 지방의 고마신사(高麗神社)가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명치때 바뀐 것을 두고 원래 다카쿠신사(高來神社)였기에 그 이름으로 복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오래도록 쓰고 있던 고마신사(高麗神社)이름을 구태여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바꾼 것은 명치정부의 입김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光)을 모시며 1300년의 긴 역사를 새겨온 고마신사(高麗神社)에 아름다운 나라의 숨결이 들려온다,”


궁사가 건네준 15쪽 짜리 한글판 《고마신사와 고마향》안내 책자에는 일본땅에 건너온 고구려인들의 자세한 역사와 함께 고마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光)과 고마(高麗)씨족의 계보 등에 관한 이야기와 고마신사에 내려오는 문화재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고구려인에 대한 기록으로는《속일본기》에 "서기 716년 (靈龜2년)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관동)에 이주 시키고 이곳에 고구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초대 고구려군 군수가 고구려왕 약광(若光, 잣코)이다.


고구려왕 약광은 고구려인의 빼어난 기상으로 황량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고 모시 등의 직물 산업을 일으켰으며 드넓은 무사시노 벌판은 말을 키우는 목장을 만들었다. 여기서 기른 군사용 말은 훗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무사 태동에 크나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주민의 정착과 산업을 일으켜 생활기반을 닦아준 약광은 백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으며 그가 죽자 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고마신사가 모시는 신이 바로 약광인 것이다.





고마신사는 고려(高麗)씨 자손이 대대로 궁사(宮司)를 맡아온 일본에서 보기 드문 신사이다. 고려씨계도에는 약광의 후예가 걸어온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신사는 14대인 일풍(一豊, 996년) 시대에 대궁이란 칭호를 받아 일본 대사원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고 22대인 1146년까지 대궁사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이후 26대까지는 고구려인 자손끼리만 혼인을 하다가 27대 풍순(豊純, 1242년) 때에 고구려인이 아닌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源賴朝) 집안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막부의 후원을 받게된다. 하지만, 이내 권력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1352년에는 고려 씨 가문의 토지가 몰수되는 등 한때 폐망의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후 행고(行高) 때에 “우리 가문은 수험도이므로 앞으로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선언을 하고 싸움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사무라이 정권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수험도(修験道, 슈겐도)수란 일종의 재래종교로서 일본 고유의 신앙이다. 7세기 역행자(役行者)에 의해 창시된 재래종교로 각지의 영산을 수도장으로 삼아왔으며 고려씨족들은 헤이안시대 말부터 명치 때까지 34대에 걸쳐서 수험도를 신봉하면서 영산기도들을 통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하지만, 1868년 명치유신에 의해 수험도가 금지되자 고마신사의 신관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 씨들은 38대부터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집을 서당으로 활용하여 마을 사람들을 교육 시켰다. 특히 56대손인 고려대기(高麗大記) 씨는 메이지 초기 근대학제가 공표되자 고려교육 심상소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미코(신사의 직원)가 내온 빛깔 고운 녹차와 꽃모양의 화과자를 나누며 기자 일행은 궁사의 '고려신사'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1시간 여 들었다. 권위적이지 않고 바로 이웃집 소탈한 아저씨 같은 궁사는 지역주민과의 밀착형 신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덕택으로 관동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나가노 등지에서도 정초 신사참배에 고려신사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연간 50만여 명이 넘는 참배객이 찾아오는 고려신사는 "출세에 영험한 신사'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고려신사 바로 근처에는 성천원(聖天院)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약광왕의 명복을 비는 보리사(菩提寺)로 고마신사와 함께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바쁜 정초 기도철에 고마후미스 궁사와 나눈 1시간 동안의 환담은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궁사는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이고 해박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귀한 시간의 대담을 마치며 한국의 전통과자를 건네자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대담을 마치고 나온 신사 경내에는 한국의 "호떡" 등 정초 참배객을 위한 임시 먹거리 장터가 생겨 참배객들의 입과 눈을 즐겁게 했다.



*찾아가는 길

주소: 埼玉県日高市新堀833

전화: 042-989-1403

가는 방법: 이케부쿠로역(池袋驛)에서 토부토조선(東武東上線)을 타고 가와고에(川越)까지 가서

JR가와사키선(川崎線)으로 갈아타고 고마가와역(高麗川)에서 내려 20여분 걷는다. 차타는 시간만 1시간 30분 정도이다. 고마가와역(高麗川驛) 가까이에는 고마역(高麗驛)이 있는데 기자 일행은 고마역에서 내려 일본인이 제공하는 차를 타고가서 쉽게 갔다. 걷는 경우에는 고마가와역(高麗川驛) 이 편하다.  

한편 성천원은 고마신사에서 걸러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