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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풍경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결혼한 일본인 다카하시 씨

짐바브웨 아이들 한국 공연 꿈꾼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제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떠난 것이 33살 때로 제 나이 올해 65살이니 벌서 31년째 입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어요. 밥말리(Bob Marley, 1945~1981)라는 자메이카 가수의 1979년 일본 공연을 보고 아프리카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처음에는 밥말리의 고향인 자메이카에 가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짐바브웨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사랑하여 올해 31년째 그곳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다카하시 도모코 (高橋朋子, 재너글아트센터 대표) 씨는 기자와의 대담 첫머리에 아프리카로 떠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다카하시 씨는 짐바브웨 어린이 공연단을 이끌고 6월의 일본 공연 준비차 도쿄로 가기 전 잠시 한국에 들러 지난 13일(월) 인천관동갤러리에서 기자와 만났다.





“33살의 과년한 딸이 아프리카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를 안했나요?”


기자의 질문에 다카하시 씨는 웃으며,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반대는 특별히 없었다고 했다. 그 대신 자메이카 가수 밥말리의 일본 공연 뒤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27살 때부터 무려 6년간을 구두쇠처럼 절약했다고 했다.


한 푼의 버스비도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등 알뜰살뜰히 모은 돈 130만 엔을 손에 쥐고 그는 미련 없이 33년간 살아온 고국 일본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86년의 일이었으니 지금의 돈 가치로 따지면 우리돈 억대 쯤 되는 돈이다.






다카하시 씨가 건너갈 무렵의 짐바브웨는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지 얼마 안 된 나라로 백인들의 흑인 차별이 아직 심한 상태였다. 따라서 흑인 어린이들의 교육은 거의 방치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일본에서 보았던 자메이카 가수 밥말리의 호소력 깊은 노래들은 주로 평화, 사랑, 평등, 희망을 주제로 하는 노래로 현지에 가서야 그가 왜 그런 노래를 불러야 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노예의 고향으로 가자”라고 외쳐댔던 가수 밥말리의 절규에 가까운 노래에 심취한 20대의 처녀 다카하시 씨는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흑인들을 위해 그 땅으로 가서 뭔가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이라도 심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떠난 길이었지만 막상 도착하니 일반 시민들의 삶도 그렇거니와 제 2의 밥말리를 꿈꾸는 음악가들 역시 단돈 한 푼의 수입이 없이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다카하시 씨는 일본에서 땀 흘려 모은 돈으로 짐바브웨 음악가들을 돕는 한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지고 간 얼마 되지 않은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난 짐바브웨 사람들과 아프리카 특유의 수공예품을 만들어 일본에 판매하는 등 온갖 노력으로 2010년에 짐바브웨 수도인 할라레 시에 <재너글아트센타>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짐바브웨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전통음악과 춤을 가르치게 되었고 그 어린이 예술단은 마침내 일본 공연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2010년부터 해마다 6월과 7월의 41일간 일본 전역을 돌며 짐바브웨 민속 공연을 하고 얻는 수익은 고스란히 짐바브웨 어린이 교육에 쓰고 있다.




인천관동갤러리의 도다 이쿠코 관장과의 인연으로 이곳에서도 아프리카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다. <짐바브웨 아트>로 이름 붙여진 수공예품들은 아프리카 초원을 그린 강렬한 색채의 액자서부터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비롯하여 빨래집개나 병마개를 활용한 생활 소품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데 이들 모두 다카하시 도모코 씨와 짐바브웨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일본 공연은 해마다 일본 전국에서 30곳 정도 합니다. 짐바브웨 전통 춤과 노래를 익힌 어린이 4~5명과 스탭이 함께 하지요. 비행기는커녕 시내버스도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짐바브웨 어린이들이 도쿄에 와서 신칸센을 타보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힘들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다카하시 도모코 씨는 일본에서의 공연 소식을 그렇게 전했다. 그러면서 “공연은 미리 사전에 신청한 곳에 가서 합니다. 초등학교 체육관일 때도 있고 구청의 음악홀이나, 회사의 강당에서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음악회장에서 할 때도 있지만 장소와 때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라고 했다. 공연단을 이끌고 일본 순회공연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말해달라고 하는 부탁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공연장에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일본사람들은 아이들이나 어른 모두 웃음이나 흥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짐바브웨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흥이 넘쳐납니다. 거의 노래와 춤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일본 청중들이 공연에 흥미가 없나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끝나고 나면 모두 좋았다고 해서 안도의 숨을 쉬곤 해요. 어릴 때부터 너무 경직된 삶을 살다 보니 커서도 흥의 발산을 잘 못하는 것 아닐까요?"


“다카하시 씨는 행복하십니까?” 기자는 대담 막바지에 그런 질문을 했다. “아주 행복합니다. 짐바브웨로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일본인들처럼 평생 ‘흥’을 모른 채 좁은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었을 거예요. 무엇보다 길들여진 가치관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워 그것을 이뤄가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게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대담 동안 다카하시 도모코 씨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꾸밈이나 치장하지 않은 구릿빛 얼굴 속에서 반짝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가 지난 31년간 조금은 낙후된 곳, 아프리카 짐바브웨라는 곳에서 이방인으로서가 아닌 진정으로 짐바브웨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들 속에서 삶을 녹여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터는 한국에서도 짐바브웨 어린이 공연단의 공연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든지 불러 주시면 일정을 조정하여 공연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공연자들이 바뀌며 이들의 공연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고, 그곳 사람들과의 교류의 물꼬이기도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라며 해맑게 웃는 모습이 원색의 초원이 펼쳐진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였다.


다카하시 도모코 씨의 짐바브웨에 쏟는 마음을 우리 한국인들도 조금 나눠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다카하시 씨와의 대담을 마쳤다.





* 아프리카 짐바브웨 어린이돕기 수공예품과 짐바브웨 한국 공연 문의

  인천관동갤러리 전화 :  032-766-8660


<현재 이곳에서는 불굴의 여성독립운동가 33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안내>

* 2017224()~4월 23() 전시기간 중

<금토일 10:00~18:00 개관, 특별한 경우 조정 가능>

* 인천관동갤러리: 인천시 중구 신포로31번길 38 (관동24-10)

<1호선 인천역에서 중구청 또는 동인천역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걸어 15>

* 전화: 인천관동갤러리 : 032-766-8660

* 주최 : 한국문화사랑협회(서울시비영리단체 제125902-733-5027 / 010-4808-9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