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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최병걸 <난 정말 몰랐었네>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108]
바람의 씨앗이라던 여인을 회상하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하늘이 시리도록 파란 날이었다.

모기만한 물체가 비행운을 만들며 지나갈 뿐 티 없이 깨끗한 날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구름이 바다에 내려앉아 하얗게 밀려왔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한 자락 없는 날인데도 바람이 불어왔다.

영동선 기차가 유혈목이처럼 지나가며 만들어 놓은 바람이었다.

싫지가 않았다. 기차바퀴의 쇳내가 기도를 지나 폐에 닿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렇게 기차 흔적을 밟으며 철길을 걷고 있었다.

 

소리, 비릿한 갈조류 냄새에 얹혀 어디선가 끊어지듯 이어지듯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지남력(指南力,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한

내 발걸음은 자석에 빨려드는 쇳가루처럼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끌리어갔다.

 

, 실례가 안 된다면 뭐 좀 여쭈어 봐도...?”

노래가 들려온 곳은 하평 언덕이었다.

철길을 등 뒤에 두고 앉으면 오로지 쪽빛 바다와 갈매기 떼만 내려다보이는 곳,

차안과 피안의 경계였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 솜씨도 보통이 아니려니와 흥겨운 리듬의 노래를 부르는데도

목소리에 배어있는 가녀린 애조는 나의 호기심을 도출하기에 충분했다.

 

어머나!”

노래를 마치고 기타를 품에 안은 채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현실을 자각시키는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다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방해하지 않으려했는데 그만...”

그녀는 하평마을이 고향이라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고 십여 년 전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어머니마저 친정으로 가버려 지금은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했다. 자신만 아버지가 그리울 때 마다 이곳을 찾는다 했다. 아버지는 대포가 한 잔 거나해지면 늘 발길을 돌리려고...’를 부르면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걸었고, 어떤 때는 딸을 업고 한참이나 철길을 걸었다 했다. 그때는 아버지의 등에 딸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외로움을 업혀있다는 것을 몰랐다 했다.

딸의 볼을 부비 던 그 까끌까끌한 턱수염이 그리움으로 남을 줄 몰랐다 했다.


바람에는 많은 게 들어있어요.

따스한 바람, 시원한 바람, 희망을 주는 바람, 슬픈 바람...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이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이유이지요.

사람을 살리는 바람 말이에요.

이곳은 모든 바람이 지나가는 곳이에요. 그 중에서도 그리움의 바람이... “

그녀는 자신을 바람의 씨앗이라 했고,

바람이 불어오자 차 시간에 늦겠다며 묵호역으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코트 깃이 일으킨 바람이 내 몸을 감싸왔다.


 

난 정말 몰랐었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아 아 아 아 아 ~~~~~

진정 난 몰랐었네


 

트로트 고고라는 세계유일 장르의 음악을 정착시킨 최병걸은 귀공자풍의 외모답게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초반에 음악계에 입문 했으나 히트곡이 늦어 1978년에 가서야 스타 반열에 오른다. 무명시절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기초를 다졌다. 서울음대 출신의 정성조는 알려진 데로 국내 최고의 실력파 연주인이었다.

 

그때 베이스 기타와 세컨드 보컬을 맡았던 조경수는 최병걸과 함께 트로트 고고의 쌍벽을 이루는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1975년 개봉된 이장호 감독과 최인호 작가의 야심작 <어제 내린 비>에서 윤형주, 박인희, 조경수와 함께 노래 실력을 겨루기도 했다. 박우철, 조경수, 최병걸은 70년대가 낳은 최고의 미남가수로 화제를 모았었다.

 

음악을 사랑한 만큼 술도 사랑하여 198838세라는 한창 나이에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유일한 히트곡 난 정말 몰랐었네를 들으며 오래 전 철길 가에서 만났던 바람의 씨앗이라던 여인을 회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