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1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대책으로서 환경학자들이 제시하는 삶의 모습은 ‘단순 소박한 생활’이다. 이런 삶을 환경적으로 풀이하면 ‘자원과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면서 쓰레기를 적게 만드는 삶’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더 간단히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젖은 현대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활방식이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사업가들이 열심히 뛰고, 교인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난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며 자녀에게 비싼 과외 공부를 시키는 것은 그들이 일류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더 좋은 직장을 구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이른바 ‘부자로 잘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환경 운동가들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생활과 일반 사회인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생활이 일치하지 않음은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종교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왜 종교를 믿을까?  가난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일요일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듣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느님은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자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내려 주신다는 이른바 기복적인 요소가 많다. 예수 믿고 3년 안에 부자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교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바라는 것은 마음의 평화나 내세의 천국보다는 현세의 물질적 축복이다. 기독교인으로서 환경적으로 바람직하게 사는 것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극소수 목회자가 있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신도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로 살도록 축복하고 기도해준다. 불교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가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신약성경 <누가복음> 18장 24~25절에는 “재물이 있는 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가 더 쉬울 것이다.”라는 유명한 비유가 나오는데, 이 구절은 목사님이 설교하기가 매우 껄끄러울 것이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설교한다면 부자 교인들은 다 달아나 버릴 것이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 3절의 산상수훈 첫 구절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의 해석은 설교자마다 달라서 일반 신도는 때로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선언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를 칭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을 환경적으로 살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난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그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가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의 성자인 성 프란체스코나 한국의 프란체스코라 일컬어지는 이현필 선생에 관한 전기를 읽어 보면, 그들이 삶에서 일반 신도가 따라 하기 힘든, 어찌 보면 고행에 가까운 가난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환경주의자가 추구하는 가난함이 단지 수입이 적은 저소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교회 다니는 부자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 것이다.


기독교와 환경을 고려하여 필자가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면, ‘금전적 수입 중에서 자신을 위하여 소비하는 부분이 적은 상태’를 기독교적인 가난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가난이란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자기를 위해서 많이 쓰는가, 남을 위해서 많이 쓰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500만원을 버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100만원만 쓰는 고소득자가 있고, 월급 200만원을 받는데 자신을 위해서 150만원을 쓰는 저소득자가 있다면,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근검절약도 마찬가지이다. 근검절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근검절약하여 저축한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월 500만원 소득자가 근검절약하여 100만 원만 쓰고 매월 400만원을 열심히 모으되 투기를 목적으로 계속해서 부동산을 사 둔다든가, 2년에 한 번씩 새 차를 산다든가, 단계적으로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데만 사용한다면 그의 근검절약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월 200만원 소득자가 근검절약하여 100만원만 쓰고 월 100만 원을 모으되, 그 돈을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 쓰기보다는 남을 위해서 쓴다면 그의 근검절약은 환경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환경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재산이 많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는 못해도 시간으로, 즉 자원 봉사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하루 24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므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형의 재산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환경적으로 산다는 것은 근검절약하면서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원과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부자로 살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 고통 받는 이웃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환경적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이 현재는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에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적으로 사는 불교도들이 늘어날 때에 우리나라의 불교는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