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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대한독립군정서를 결성한 '김 혁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혁 [1875∼1939] 선생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산업의 진흥과 아울러 무력투쟁을 계획하여 백두산 아래 화룡현(和龍縣)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와 백두산 동북쪽인 왕청현(汪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興業團)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화(桂和)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 300여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올 때 그도 유우석(柳佑錫)과 함께 무송현(撫松縣)으로부터 와서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년 8월 30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교회(韓僑會), 대한광복단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대표 및 통군부 대표 등 8개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하여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군에게 쫓겨 노령지역으로 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은 후 1924년 초에 북만지역으로 돌아와 현천묵(玄天默)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조성환(曺成煥)·나중소(羅仲昭)·김규식·이장녕·김필(金弼)·권영준(權寧濬) 등과 함께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북만 영안현(北滿寧安縣)에서 재야혁명가들을 모집하여 전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동년 3월 10일에는 발해의 고지(故地)인 영안의 성내(城內)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민사부위원장인 최 호(崔灝),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빈(許斌), 연락부위원장 정신(鄭信),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돈(金墩)과 함께 재만동포의 안정과 대일항쟁을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에 임명되어 부교장 김좌진, 교관 박두희(朴斗熙)·오상세(吳祥世)·백종열(白宗烈) 등과 함께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중동선 석두하자(中東線石頭河子)에서 경리부위원장 유정근과 본부직원 김윤희(金允熙)·박경순(朴敬淳)·한경춘(韓慶春)·남중희(南重熙)·이종순(李鍾淳)·이정하(李正河)·고문 남극(南極) 등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9년 6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개요
○ 1919 3.1운동 참여
○ 1922 대한통의부, 대한독립군정서 결성
○ 1925 신민부 결성,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성동사관학교 교장 역임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