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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갱장록(羹墻錄)》-선왕들의 업적 모음 결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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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상적인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임금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으뜸이 효(孝)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효를 실천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선왕들의 공적을 기리고 이를 기록으로 정리하여 펴내는 일이었습니다.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했던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명으로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은 이러한 성격을 가진 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임금이 요임금을 그리워하듯

 

《갱장록》의 갱(羹)과 장(墻)은 고기와 나물을 넣어 끓인 국물이 있는 음식 곧 국과 담장[墻]이라는 뜻으로 중국 고대의 제왕인 요(堯)와 순(舜)의 고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가 세상을 떠나자 순이 요를 그리워하여 밥을 먹으면 국에서, 자리에 앉으면 담장에서 요를 보았다는 내용으로,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요는 효성이 지극한 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했고, 순은 요를 이어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요순시대는 통치가 잘 이루어진 태평성세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요와 순의 행적에 관한 여러 고사 가운데서도 이 고사를 내세워 책 제목으로 삼은 것은 선왕들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록하여 본받겠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정조가 신하들과 책 제목을 논의하면서 이 책을 펴내는 취지가 제목에 들어 있다고 한 것도 선왕을 본받는 일이 곧 요순을 본받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왕들의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다

 

《갱장록》은 1786년(정조 10)에 정조의 명으로 이복원(李福源, 1719~1792) 등이 선대 임금들의 행적에서 모범이 되는 내용을 뽑아 엮은 책입니다. 1785년에 정조가 궁중의 서고에서 영조의 명으로 이세근(李世瑾, 1664~1735)이 편찬한 《성조갱장록(聖朝羹墻錄)》을 보고, 영조의 업적이 수록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행적까지 넣어 다시 펴내도록 하였습니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서 영조까지 19대 임금의 모범이 되는 행적을 20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편찬한 《갱장록》의 첫머리에는 편찬 책임자인 이복원이 펴내는 취지를 담아 임금에게 올린 전문(箋文)을 실었습니다. 이어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일러두기에 해당하는 범례(凡例)를 실었습니다. 본문은 8권 4책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마지막에 이복원이 펴낸 경위와 편찬 의의 등을 서술한 발문(跋文)을 넣었습니다.

 

20개 항목 가운데 제일 처음 나오는 ‘창업(創業)’에서는 조선 왕조의 개국 과정을 서술하였는데, 특히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의 업적과 고사를 수록하였습니다. 이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 대대로 덕을 쌓고 인(仁)을 실천하였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어지는 항목 ‘경천(敬天)’은 임금은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그 뜻을 살펴야 함을 보여주려는 의미입니다. 선왕들의 효를 실천한 예와 집안을 잘 다스린 예를 기록한 ‘돈효(篤孝)’와 ‘치곤(治梱)’이 뒤를 잇고, 제왕의 공부와 인재 등용, 백성들에게 생업을 권장한 예, 각종 제사와 제도정비 등을 차례로 서술하였습니다. 마지막 항목인 ‘건중(建中)’은 마음의 중심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법칙을 정립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붕당(朋黨)을 이루어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료들을 다스리기 위해 중심을 잡고 기강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갱장록》은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列聖御製)》, 행장(行狀)과 지문(誌文) 등을 모은 《열성지장(列聖誌狀)》, 역대 국왕들의 선정을 모아 편년체로 편찬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기본 자료로 삼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경국대전(經國大典)》 따위에서 관계 사실을 뽑았으며,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펴낸 《조감(祖鑑)》, 이세근이 표낸 《성조갱장록》, 정항령(鄭恒齡, 1700~?)이 펴낸 《상훈집요(常訓輯編)》의 체제를 참고하여 펴냈습니다. 각 항목의 기사는 임금의 재위 순으로 정리하면서 연대를 밝혔고 각 기사의 끝에는 출처를 밝혔습니다.

 

《열성어제》와 《열성지장》등은 소략하며, 《국조보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고 내용도 많아 참고에 불편한 반면 《갱장록》은 항목별로 요점만 추려서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실제로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를 비롯한 후왕들은 『갱장록》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선왕들의 행적을 익히고 이를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정조, 간행에서 배포까지를 관리하다

 

《갱장록》은 1785년 10월경부터 편찬을 시작하였고, 1786년 4월 10일에 인쇄에 들어가 22일에 마쳤습니다. 정조는 이 책이 간행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편집과 교정의 진행 과정을 수시로 점검하고 책 제목에 대해서도 신하들과 상의하였습니다. 일관(日官)에게 명하여 책을 표내기에 좋은 길일(吉日)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인쇄에는 정유자(丁酉字)를 사용하였는데, 정유자는 1434년(세종 16)에 만든 갑인자(甲寅字)의 글자체로 1777년(정조 원년)에 정조가 다시 만든 활자입니다. 정조는 세손(世孫) 시절인 1771년(영조 48)에 갑인자의 글자체로 금속활자 15만자를 만들고, 이 때 정유자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정유자가 완성되자 정조는 “우리 영묘(英廟:세종)의 뜻한 일이 길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흡족한 마음을 표현하였는데, 이 역시 선왕의 행적을 기리고 본받는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정조는 이 활자를 내각(內閣)에 보관해두고 주로 정조의 명에 의해 펴낸 책을 간행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갱장록》을 정유자로 간행하였다는 것은 이 책에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이상 실천을 대표하는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갱장록》은 105건을 인쇄하였으며 완성된 책은 일관이 뽑은 길일인 4월 25일에 임금에게 올렸습니다. 인쇄한 책들은 임금이 보는 어람용(御覽用) 외에 봉모당(奉謨堂)과 규장각(奎章閣), 홍문관(弘文館),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에 배포하였으며, 사고(史庫)에 보관하는 용도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이 책의 편찬과 교정 등에 참여한 이복원, 조준(趙㻐, 1727~?) 등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하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갱장록》이 영조 때 편찬한 《성조갱장록》과 《상훈집편》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각각의 편찬자인 이세근의 집안과 정항령의 집안에도 각각 1건씩을 보내주도록 하였습니다.

 

같은 날 책 편찬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도 상을 내렸습니다. 편찬 책임자인 이복원에게는 왕이 타는 말인 구마(廏馬) 한 필을 하사하고 공로와 직책 등에 따라 하급 서리에 이르기까지 관례에 따라 상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갱장록》의 펴냄 과정을 기록한 의궤(儀軌)를 제작하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재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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