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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마포 복개당(福介堂)의 유래와 성격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20, 복개당(2)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마을신앙이 지연공동체로 존립되어 진다는 것은 학계의 조사 연구에 의해 확인되는 바다. 이와 같은 공동체 신앙 형식의 특징은 한 곳에 정착된 거주민들이 각자의 이익을 도모키 위해 서로간의 유대관계 속에서 존속시킨다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되어진 지연공동체 신앙은 고대사회에서 있어온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천신제 등을 통해 옛 모습을 불 수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마을신앙으로 까지 이어져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을신앙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신앙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신앙이 이토록 오랜 세월 버티어 오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화합과 단결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지연적 공동체 유지이다. 의례를 규정화하여 마을 사람들이 특정 신앙 대상과 의례 기간을 정하고 이를 신성시하면서 속(俗)에서 성(聖)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려는 것이 마을신앙의 지속적 존립을 위한 고단위적 계산인 것이다. 악가무극이 동원될 수 있는 연희적 부분들을 두드러지게 표면화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신명풀이로 명분화하여 신인합일의 의지를 가지려는 것도 마을신앙의 주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유래와 성격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던 복개당은 철거되기 직전까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었다. 무라야마지쥰이 1920년 복개당을 조사할 당시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신수철리(新水鐵里)였고 약 300여 호에 살았던 주민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거나 밭농사를 하였다. 상업 종사자와 농업인들로 구성된 거주지이었다면, 이곳 신수철리는 그 당시 도시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복개당이 있었던 신수철리는 20세기 초, 적어도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도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라야마지쥰이 이곳을 조사한 1920년 무렵에는 복개당 신앙체계가 도시화의 영향으로 변화 과정에 있었다고 보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보는 것은 민속현장이 변화되는 여러 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크게 작용되는 것이 도시화의 물결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시화가 더욱 가속화되어져 1936년에는 경성부로 편입되어 신수정(新水町)으로 바뀌었다. 경성이 더욱 발전하면서 부(府)가 서울특별자유시(特別自由市)로 변경되자, 1943년부터 서울특별자유시 서대문구 신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후, 1944년에는 서울특별자유시 마포구 관할로 재편되었고 1946년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복개당은 옮기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었건만,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를 경기도로 두었다가 경성부로 옮기더니 다시 국제적 도시로 발돋움한 서울로 바꾸어 놓았다. 근대 한국 민속연구에서의 행정적 구역 변화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민속 변화 과정은 근대화와 맞물려져 사회 문화구조 변화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속자료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올바른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는 주변의 여러 요인들을 주요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복개당이 속해 있었던 지역의 행정구역 변화 속에서는 다분히 여러 가지 변화가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에 따른 신앙체계 및 의례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복개당이 사라진 현 시점에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유래와 성격이다. 그런데 복개당이 언제부터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이 없어진지 4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당에 대한 유래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제보자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역사적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가 기록인데도 복개당 관련의 두 개 중수기에서는 유래나 역사에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찾아 볼가 없다. 1829년과 1868년 두 번에 걸쳐 중수기를 남겼지만, 당 건립이 어느 때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복개당 존재와 역사적 유래에 대한 자료는 무라야마지쥰이 1937년에서 보고한 《부락제(部落祭)》, 조선총독부자료(朝鮮總督府調査資料)가 전부일 정도다.

 

이 자료에 보면, 당시로부터 약 150년 전에 손복개라고 하는 마을사람이 선몽으로 세조대왕을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면서 당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무라야마지쥰이 책을 펴낸 때는 1937년이다. 그러나 책을 펴내기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한 것은 그 이전일 테이고 채집한 자료는 1937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밝힌 조사내용은 1920년을 기준하고 있다. 무라야마지쥰은 동경제국대학 철학과에서 사회학 전공을 한 후 1919부터 1941년까지 조선총독부 상근 촉탁(오늘날 문화재청 상근 문화재전문위원 직급)으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전국 곳곳의 부락제들을 조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1920년에 마포의 복개당을 조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 시기부터 조사된 무라야마지쥰의 자료들은 1929년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을 서두로 하여 모두 11종의 논저를 발표했다. 그리고 1937년에 이르러 《부락제》를 펴낸 것이다. 그가 복개당을 포함하여 한국의 부락제를 조사하게 된 목적은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정책(心田開發政策)’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데에는 당시 일본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1934년부터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심전개발정책을 주창하게 되었고 이를 종교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방안을 강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그런 정치적 상황에 힘입어 무라야마지쥰은 한국의 부락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라야마지쥰이 복개당을 조사한 때는 1920년으로써 그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부임하여 다음 해에 복개당을 조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당시 심전개발정책 발단은 1934년경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부락제에 관심을 갖고 복개당을 조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찌되었건, 무라야마지쥰이 복개당을 조사한 년도, 자료제보자의 내용 등의 내용을 토대로 보면 복개당은 1770년 쯤 세워진 것으로써 그 역사는 대략 240여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에 복개당 언급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 자료는 1639(인조 17)년에 기록된 것인데 그 내용은,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의 어미인 무인(戊寅)을 먼저 수금(囚禁)하겠다.”는 의금부(義禁府)의 계 등이다. 이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인조실록》에서도 복개당에 관한 기록이 보여 흥미롭다. 의금부가 무녀들이 행한 저주에 대한 것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 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두 기록에 보이는 복개당은 동일한 당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사건 발생년도도 동일하다. 복개당이 마포 신수동에 있었던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본 사건 기록에서, 무녀 천금(賤今)이 공덕리(孔德里) 조춘금(趙春金)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도사(都事)가 붙잡으러 가자, 춘금의 아내가 용산(龍山)에 가 있다고 속였는데…운운 등의 지명을 통해서다.

 

여기에 보이는 공덕리와 용산은 모두 마포 일대의 지역으로로써 신수동 복개당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은 두 자료의 기록으로 보아서 분명 복개당은 1639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복개당 주신으로 모셔진 세조대왕(世祖大王)은 1417년에 태어나서 1468년에 사죽은 실재 인물이다. 조선 제7대 임금으로서 14년간 재위하였던 세조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군왕이다. 무속신앙에서 역사적 인물이 신으로 등극되는 것은 사후의 일인데 세조대왕이 무속신앙의 신격으로 봉신되기 위해서는 1468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과 함께, 복개당 주신인 세조대왕을 신격화하기 위해서는 복개당이 빠르면 542년 전인 1468년에 지어진 것이고 늦으면 371년 전인 1639년에 건립되어졌을 것이라는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무라야마지쥰이 밝힌 것 보다는 최소 131년 또는 최고 302년이나 앞선다.

 

<복개당 현판>(부록 70쪽)에서의 복개(福介)라는 명칭이 마을 사람 손복개(孫福介)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무라야마지쥰의 구전자료 내용은 일찍이 수긍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복개당에 관한 여타의 서술들은 모두 무라야마지쥰이 이 곳 부락제 조사 자료에서 밝힌 마을민 손복개 이름과 연관지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왔다.

 

“마을사람 손복개(孫福介)가 어느 날 꿈에서 노인을 만났는데, 마을 인근 괴목 위에 걸린 세조대왕 영정을 찾아다 마을에 당을 지어 봉안하고 매년 봄ㆍ여름ㆍ가을 세 차례 제를 지내게 되면 자신의 집은 물론 마을 모두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 하였고, 그 후 사람들은 마을에 당을 짓고 그 이름을 꿈에 계시 받은 손복개(孫福介) 이름을 따서 복개당(福介堂)라고 불렀다.”라는 것이다. 이렇듯 단순한 믿음으로 인한 과오는 그동안 무라야마지쥰 자료에 대한 검증이나 학문적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당과 관련된 어원 탐구는 일찍이 조지훈의 《누석당(累石壇), 신수(神樹), 당(堂)집 신앙 연구》에서 행해졌다. 조지훈은 그의 연구에서 고대 민간신앙의 뿌리는 오늘날까지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 돌무더기[석단ㆍ石壇], 신목[神樹], 당집(堂집) 형태로 된 신앙공간이라 규정하고 석단과 신목 형태는 혼합되어 전승되어진 애초 형태의 신앙처지만 당집은 후기에 발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