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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고려충신 박익 선생의 신계서원제기 (新溪書院祭器)

문화재자료 제135호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박익(1332-1398) 선생은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조판서(工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松隱),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고려의 송경(松京)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별세 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신계서원 제기는 조선 헌종 5년(1839)때에 박익 선생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그릇들이다. 제작 당시에는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술잔 6개, 술통 2개, 사각형 밥그릇 4개, 원형 밥그릇 2개, 촛대 2개,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 1개 등 18점이 남아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으로 만들었다. 해마다 3월 신계서원에서 박익 선생의 제사에 사용하고 있다.

 

<자료: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