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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운초의 무덤에 잔을 올리고 싶었지만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9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蓮花蓮葉覆紅欄(연화연엽복홍란)  연꽃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綺閣依然泛木蘭(기각의연범목란)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潑潑游魚偏戱劇(발발유어편희극)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有時跳上錄荷盤(유시도상녹하반)  때때로 연잎위로 솟구친다네.

 

천안 광덕산을 오르다가 발견한 시비(詩碑)에 적힌 시의 앞부분이다. 19세기 전반의 여류시인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1813 ~ ?)의 시다. 시비를 지나 좀 더 오르다보면 운초의 무덤도 볼 수 있다. 평안남도 성천 기생의 무덤이 왜 광덕산에 있을까? 지금부터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운초는 원래 양반집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간다. 퇴기가 괜히 수양딸을 받겠는가? 퇴기는 운초가 방년(芳年)의 나이가 되자 운초를 성천 기적(妓籍)에 넣는다. 운초는 기생이 되자 금방 뭇사내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는 기생이 된다.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뭇사내들이 찾고 싶은 기생이었던 것은 아니고, 운초의 매력은 가무음률은 물론 뛰어난 그녀의 시문(詩文)에 있었다.

 

어느 해에 유관준이 신관사또로 성천에 온다. 유관준은 운초라는 명기(名妓)를 자신의 품안에 둘 수도 있었으나, 운초를 자신의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에게 보낸다. 이미 운초의 명성이 성천 고을을 넘어섰기에, 김이양은 제자가 성천 사또로 간다고 하자, 운초를 잘 돌보아주라고 하였다나? 일개 기생을 알아주는 평양감사에 운초는 어찌 감격하지 않을손가? 김이양 또한 운초의 시의 향기를 직접 눈앞에서 맡으니 운초가 그렇게 예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났을 때 김이양은 77살, 운초는 19살! 운초는 김이양에게는 손녀도 한참 손녀뻘 아닌가? 아니 일찍 결혼하는 조선의 풍습으로 보았을 땐 증손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하였던가? 처음 할아버지처럼, 손녀처럼 서로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며 시의 세계에서 교유하던 두 사람은 결국 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조선 시대에 77살이면 살아있어도 이미 관 근처에서 서성거릴 나이인데, 김이양은 그때까지도 꽃다운 나이의 여자와 사랑을 나눌 정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김이양이 평양 감사로 있을 수는 없는 법.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김이양은 운초를 기적에서 빼주고 곧 사람을 보내 데려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계속 시간은 흘러가는데도 한양에서는 소식이 오지 않는다. 이때 운초가 김이양을 그리며 쓴 시가 그 유명한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시를 탑을 쌓듯이 2행마다 한 글자씩 늘려가며 총 36행의 문자탑을 쌓았기에 보탑시라고 하는 것이다.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悵遠離

   ....................

 

이런 식으로 시의 탑을 쌓아나가, 마지막 35, 36행이 되면 18글자가 되는 문자탑이다.

 

“이별하니 더욱 생각나는데, 길은 멀고 소식은 왜 이리 더딘지요. 몸은 여기에 있지만, 생각은 그대에게 달려갑니다. 비단수건(紗巾)은 눈물로 마를 새 없건만, 그대로부터의 편지(雁書)는 기약이 없고... 향각(香閣)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이 밤, 연광정(鍊亭) 위로 달도 떠오르는 시각. 외로운 베개(孤枕)에 의지하다 잠시 꿈(殘夢)에도 놀라 깨어, 돌아가는 구름(歸雲)을 바라보자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이렇게 슬플 수가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 의역을 해보았다. 의역을 하다 보니 나 또한 운초의 처절한 슬픔에 움칫하는 것 같다.

 

운초의 보탑시를 보았음인가? 이윽고 한양에서 운초를 데려갈 사람이 온다. 한양으로 올라온 운초는 김이양이 마련해놓은 남산 기슭의 초당에 자리를 잡는다. 운초의 시재(詩才)는 한양에서도 금방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시인묵객들은 운초를 초당마마로 부르며, 운초의 초당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현세에서 김이양과 운초가 행복한 꿈에 젖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랑하는 님이 자꾸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운초는 김이양이 85살이 되었을 때는 이런 시도 지었다.

 

   客子靑靑日遲遲 (객자청청일지지)  나그네 청춘의 날은 아직도 멀고먼데

   主人白髮亂如絲 (주인백발란여사)  주인의 백발은 실처럼 어지러이 날리는구나

 

사람이란 엄연한 시간의 장벽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 91살에 세상을 떠난 김이양은 천안 광덕산에서 영원의 잠에 든다. 김이양이 이 세상을 떠났어도, 운초는 아직 33살의 무르익은 몸. 그러나 사랑하는 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운초에겐 이승의 삶은 이젠 시들해졌음인가?

 

운초가 언제 이승을 떠난 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운초는 원래의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찍 김이양을 만나러 떠난다. 그리고 김이양을 찾아 이곳 광덕산 자락에서 영원의 안식처로 든다. 운초의 무덤 앞에 섰다. 생각 같아서는 운초의 무덤 앞에 잔을 올리고 싶으나, 아쉽게도 준비해온 것이 없다.

 

 

그런데 먼저 이곳으로 찾아든 김이양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비록 운초가 김이양을 따라 광덕산을 찾아왔지만, 지체 높은 대감의 자제들이 운초가 김이양 옆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이제 170년의 세월이 훌쩍 뛰어넘은 지금, 운초를 사랑하는 후손들은 운초를 찾아 광덕산을 오르고, 또한 운초를 추모하는 문학제도 열고 있지만, 김이양이 광덕산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도 없다.

 

권좌는 쉽게 잊히지만 문학은 세월의 흐름 속에도 계속하여 세인을 찾아오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리라. 이제 나는 운초의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광덕산 정상으로 향한다. 가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리는 나에게, 운초는 부용꽃 같은 미소를 띠면서 손을 흔든다. 그 향기로운 환영(幻影)을 가슴 속에 고이 접어 넣으며,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광덕산 위로 위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