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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깨달음 꽃으로 피어나라. 봉화 문수산 '각화사'

《조선왕조실록》를 보관했던 태백산사고가 있었던 곳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각화사는 한국불교의 영원한 스승인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한다. 각화사가 세원진 때는 신라의 남북국시대 신문왕 시절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창건 이후 기록은 별로 전하지 않고 있으며, 500여년이 지난 고려 예종 때, 무애(礙)국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이후 여러차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각화사는 조선왕조실록 수호절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선조때 (39년, 1606) 전란이 와도 해를 입지 않을 첩첩산중인 이곳에 지어졌다.  임진왜란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다시 펴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태백산사고 수호절로 지어진 태백산 문수사의 각화사는 한 때는 8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정진하여 국내 3대 수행사찰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기울고 한일병합이 되고나자, 전국에는 들불처럼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전국의 의병들이 태백산으로 숨어들자, 일본군들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들이닥쳐 귀하게 간수했던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와 각화사를 불태웠다. 폐허가 된 얼마후 1926년 사라진 절터에 또 다시 달현스님이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여 각화사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979년 대웅전 앞 경사지에 2층으로 범종각을 지어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

 

태백산 깊은 산중에 위치한 각화사에는 이런 우여곡절 속에 다시 살아남았고, 오래된 문화재로는 정확한 조성연대도 모르는 삼층석탑과 귀부(비석의 좌대로 거북모양의 돌)가 있다. 삼층석탑은 완전히 무너져 땅속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며, 귀부는 본래는 고려초 좌간의대부였던 김심언이 통진대사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채인 비석은 없어지고, 지금은 각화사의 내력을 설명한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태백산 두메산골을 수도처로 정하여 절을 세운 스님들의 원력과, 그곳이면 절대로 화를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태백산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이를 보호하게 하기 위하여 억불시대에도 각화사를 인정했던 조선왕조의 바람이 있었지만, 새로운 무기를 앞세워 닥쳐온 전란에는 속절없이 화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후대 스님들은 그 폐허 위에 다시 절을 짓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방에서 여름, 겨울에 정진하고 있다. 스님들의 그 끈질긴 구도 정신에 숙연함을 표한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행위는 무상하여 태어나면 죽는 것이 진리로다.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己  寂滅 爲樂) 태어나고 죽음을 넘어서면 적멸의 즐거움에 이르게 되도다.

 

수행처로 역사가 깊은 각화사의 수행승들이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설산동자처럼 수행하는 스님들이 설산동자처럼 깨달아 세상으로 다시 나와 중생계도 구해주길 바래본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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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