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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서울 김유신장군당(金庾信將軍堂)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26]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155번지에는 명화전(明化殿)이 있다.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마을 사당이다. 김유신장군사당(金庾信將軍祠堂)이라고 했던 것을 2000년 이후부터 명화전으로 부르고 있다. 당 내부 중앙 벽면에 김유신 장군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고 양옆으로 산신, 삼불제석 등의 무신들이 봉안돼 있다. 솟을문으로 되어 있는 정문 앞에는 김유신장군명화전연혁비(金庾信將軍明化殿沿革碑)가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 당주가 거주하는 살림채가 붙어 있다.

 

 

 

이 당은 원래 지금 자리보다 아래쪽 한강 변에 인접해 있었던 것인데, 1941년 일제강점기 때 경원선 철도공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 위치인 높은 언덕바지로 옮겨져 온 것이다. 원래 자리보다는 높은 곳으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강을 훤하게 바라보면서 지역민들의 안식처로써 역할 하여 왔었다. 1990년 개축 및 증축이 이루어져 주신을 모신 전각 이외 하주당과 당주가 거주하는 건축물들도 덧붙여 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당 바로 앞에 높다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더 한강을 바라볼 수 없는 당이 되고 만 것이다. 명화전이 존립한 된 연유는 김유신 장군과 한강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남달랐다. 결국, 20세기 초기부터 지속해서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가 명화전의 본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이 명화전(明化殿) 주인공 김유신(金庾信)은 신라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나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죽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이다. 삼국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하여 당대에 명성 높은 대신(大臣)으로 그리고 정치가로 이름 석 자를 날렸던 명 장군이었다.

 

그가 죽은 뒤, 무당들에 의해 무신(巫神)으로 봉신 될 정도로 살아생전 이룩했던 명성은 대단하였다. 무열왕 즉위와 삼국통일 등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까지 성신(聖臣) 또는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아 왔다.

 

김유신을 모시는 제당이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김유신장군당으로 세워지고 또한 지역들에 의해 추존 받는 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도 살아생전 그의 영웅적이고 신이(神異)로운 행적과 깊이 관련되고 있다. 김유신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한강을 배경 삼아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보광동 인접 지역의 한강 물이 비교적 얕았던 까닭으로 이곳에 배수진을 쳐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은 고구려를 물리치는 데 부족함이 없었겠지만, 전술을 펼칠 수 있게 했던 지역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한몫했을 것이 분명하다. 김유신의 그러한 고마운 마음은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선심을 베풀고 돌봄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행적이 그가 죽은 후 보광뒤 주민들이 장군을 기리면서 한강을 바라보는 곳에 당을 지어 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 서울 용산구 보광동 일대에서 김유신 장군을 믿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신격화되면서 마을의 좋지 못한 나쁜 액을 막고 지역민을 돌보는 지역 수호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가 사람에 따라서는 수백 년이 넘었다고 하는 예도 있고, 1,000년이 되었을 것이라고 현장조사 응답자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역사적 실존 인물이 신격화되는 것은 사후 일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죽은 뒤 곧바로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하였다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1,300여 년의 긴 역사를 훌쩍 넘긴다. 이 역시도 추측되는 것뿐이며 그에 명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중요한 사실인즉, 김유신 장군이 전쟁을 하는 동안 이곳 보광동 일대가 전술지로 활용되었고,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고마움을 갖고서 지역민들에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한편, 김유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맹스럽고 영웅적이며 신이(神異)로군 행적을 보였던 인물이다. 그래서 사후 신격화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역사적 행적이 주요하게 반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김유신 탄생을 일러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몸 등에 칠성 무늬가 있고, 또한 신이한 일이 많았다’라고 하는 것이 한 예이다.

 

한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경상도 군위현에 김유신신사(金庾信神詞)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萬明)을 섬기는데 신당에는 구리거울의 명도(明圖)를 걸어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萬明) 또한 무당들에 의해 무신으로서 봉안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무속신앙에서 김유신 장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신앙이 되는 점 또한 특이한 점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에는 예로부터 지역 곳곳에 부군당(府君堂), 붉은 당, 도당(都堂), 대동당(大同堂), 동제당(洞祭堂), 용신당(龍神堂), 용궁당(龍宮堂), 우물당, 산제당(山祭堂), 산신당(山神堂), 불당(火堂), 사당(祠堂), 서낭당 등의 마을당이 있어서 그곳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제를 지내고 굿을 해왔다. 이와 같은 대동적 제례는 특히 한강을 끼고 있는 강 주변과 산 밑의 지역주민들에 의해 성행해 왔다.

 

지역에 따라서는 유교식 제례를 지내고 무교식 굿을 겸하는 곳이 있는가 하며, 유교식 제례를 올리는 곳만 있기도 하고 또는 무교식 굿만 하는 예도 있다. 꼭 그러하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 유교식 제례만을 올릴 때 이를 당제라고 칭하지만, 유교식 제례와 무교식 굿을 겸하는 곳에서는 당굿, 도당굿 또는 부군당굿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서울의 대동적 의례는 6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산업화의 지역개발 속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현재까지도 몇몇 곳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현대인들의 종교관 변화로 인한 부정적 인식을 비롯하여 도시개발과 아파트 건축으로 인한 당 건물축 철거 또는 위협, 관계 당국의 편협한 문화정책과 전통문화 푸대접 등으로 적지 않은 위협을 받는 실정이다.

 

 

서울의 당제 또는 당굿 행사는 지역에 따라 매년, 격년, 또는 삼 년마다 아니면 부정기적으로 행하여진다. 일 년에 봄ㆍ가을 두 번 행하는 곳도 있으며, 매년 두 번 하되 한번은 굿을 하고 한번은 간단한 고사를 지내는 예도 있다. 굿을 할 경우, 주로 정월 초하루, 삼월 초하루 또는 삼월 삼짇날, 4월 초하루, 6월 초하루 시월 초하루에 당일 행사로 한다.

 

그러나 준비과정이 있어서 하주 모임부터 시작하여 인줄 매기, 조라술 담그기, 장 보기, 제물 장만 등의 절차를 합하면 적어도 본 행사 보름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유교식으로 제를 올리는 경우는 제관들이 유교식 의복을 갖추고 분향, 재배, 축문낭독, 소지(燒紙) 올림 등으로 진행되며, 무교식 굿을 행할 때는 유명 만신과 악사를 불러 서울굿 완판으로 행해진다.

 

김유신장군당에서는 그 의례를 당제와 당굿을 혼합하여 부는데, 사당제로 부르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부군당제 또는 부군당굿이라고도 한다. 당제를 지내기 위해선 우선 마을 원로 주민들로 구성된 명화회(明化會)가 주최하는 ‘하주 모임’을 갖는다. 명화회는 젊은 사람에서부터 80대까지 약 100여 명의 보광동 토박이와 거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간단체이다.

 

이 모임의 주목적은 당제 지속을 위한 마을민들의 재정적 정신적 협력과 단결이다. 그래서 모임을 하게 되면 우선 지난해 쓰인 재정에 대해 결산보고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치러질 당제 예산을 비롯한 제관 역할의 상하주 한 명과 육 하주 여섯 명을 선정한다. 그리고 토박이는 물론이고 이주해 온 거주민들도 당제에 참여하여 모두가 대동단결할 방안을 논의한다.

 

조라술 담그기 일정과 참여자를 결정하고, 당 걸립 방법과 참여도에 대해서도 의논한다. 그 외에 당제 행사의 전반적 내용을 점검하고 결정한다. 2000년도 모임은 1월 20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 용산구 보광동 도원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명화회 회장 황병열을 비롯하여 전회장 김진열, 안홍옥, 김정해 등 3명의 고문과 총무 정만진 등 21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