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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기리는 글

세종대왕과 박연, 조선의 ‘황종율관’을 만들다

[세종대왕 즉위600돌을 기리는 글 3]

[우리문화신문=최기호 교수]  세종대왕은 “좋은 음악을 들으면 좋은 마음이 생기고, 좋은 마음이 생기면 좋은 정치가 이뤄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유교에서 예(禮)와 악(樂)은 종묘제례에 매우 중요하므로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장려하였다.

 

세종대왕은 이런 어록을 남겼다. “조선은 본래 향악에 익숙한데, 종묘제례에 당악(唐樂)을 먼저 연주하고, 끝에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들이 평시에 들으시던 향악을 쓰는 것이 어떨지, 그것을 맹사성과 더불어 상의하라.” 《세종실록》 1425년(세종 7) 10월 15일

 

그리고 세종대왕은 "종묘제례에서 선왕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존경을 하게 되어 이를 방방곡곡에 널리 퍼뜨리면 백성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된다.“고 하였다.

 

 

궁중에서 연주되던 음악으로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이 있는데 당악이란 중국에서 전래된 음악을 말하고 향악이란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에 오래 전래되어 온 음악을 말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향악은 중국 당악과 다르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우리나라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 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다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난계 박연(朴堧)에게 향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박연은 충청도 영동 사람으로 《난계유고》를 남겼으며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으로 추앙되고 있다.

 

 

세종대왕은 박연을 악학별좌로 기용하여 중국의 율관(律管)과 다른 조선의 새로 율을 창작하도록 하였다. 율관이란 음을 조율하는데 사용했던 ‘소리 관’(pitch pipe)인데, 보통 대나무관으로 되어 있다.

 

한 옥타브를 6개의 양률(陽律)과 6개의 음려(陰呂)로 구성하여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의 12반음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서양악보의 도ㆍ레 ㆍ미ㆍ파ㆍ솔ㆍ라ㆍ시ㆍ도 등의 계이름과 대비되는 것이다.

 

황종은 첫 번째 양률로 가장 낮은 음을 말하는데, 율관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도량형의 길이와 부피, 무게의 기준이 되므로, 나라 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징표가 되는 것이다. 박연은 중국의 기장알과 해주의 기장알을 견주고, 밀랍[蠟, 꿀벌이 벌집을 만들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으로 낟알을 빗어서 율관을 시험하여 우리의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한서 율력지(律曆志)》에 보면 90알의 기장알을 일렬로 늘어놓아 한 알의 폭을 1푼(分)이라 하고, 10푼을 1촌(寸), 10촌을 1척(尺), 10척을 1장(丈), 10장을 1인(引)이라고 정하였다. 부피와 무게도 같은 원리로 정하였다.

 

세종대왕은 황금율관을 만든 후에 경기도 남양에서 ‘소리 나는 돌’, 경석(磬石)을 채취하여 1427년(세종9)에 편경을 만들도록 하였다. 세종대왕은 편경을 처음으로 시연할 때 한 음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에 따라 악공들이 편경을 다시 해체하여 살펴보니 경석의 먹줄 친 한 부분이 아주 조금 남아 있어서 다시 깎아내고 연주하니 음이 제소리로 딱 맞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천부적인 음악 소양과 전문적인 음악연구를 바탕으로 향악과 아악의 정비를 직접 주도했다. 세종대왕은 절대 음감의 전문성을 지닌 음악인으로서 세계 유일의 길이악보인 ‘세종악보(井間譜)’를 창안하였고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같은 노래도 작곡하였다.

 

《세종실록》에서 세종대왕은 “박연이 조회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율려신서(律呂新書)》도 형식만 갖추어져 있다.”라고 평하였다. 세종대왕은 몸소 《율려신서》 등 악서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고, 박연 같은 음악 전문가에게 자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29년(세종11)에는 마포 주종소에서 편종 제작에 필요한 주조법, 조율, 표지 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편종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은 박연 외에도 남급, 정양, 장영실 등도 악기 제작에 참여하여 성과를 내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박연에 대하여 "그대는 내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짓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역시 음악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대왕의 음악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데 '세종실록악보'가 《세종실록》(권136-권146)에 기보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황종율관의 제작을 비롯하여 편경, 편종 등의 악기 제작, 제례악곡을 작곡하였고 악보편찬 등 음악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