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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작은한강 부군당과 부군당굿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28],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한강(漢江)의 옛 이름은 큼과 신성함의 의미를 갖는 ‘아리(알)수’이다. 우리나라 중부지역인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특별시를 거쳐 우리나라 서쪽에 있는 서해(西海, 황해-黃海)로 흘러가는 강이다. 한강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유래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이며 ‘가람’은 ‘강’을 뜻한다. 중국 문물이 들어온 이후부터 ‘漢’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도 크다는 의미를 갖는다.

 

한강이 전통사회에서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현대사회에서는 환경의 원천으로써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강은 오랜 시간을 거쳐 생성되고 축적된 유무형적 민속과 신앙 자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어서 서울의 역사 문화를 안고 있는 유무형문화유산의 보고로서 역할을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한강과 더불어 옛 정취를 풍겼던 한남동의 “작은 한강 부군당과 당굿”만을 살펴보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강 유역에는 오래전부터 도(渡)와 진(津)으로 구분된 많은 나루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커다란 대로로 이어진 나루를 도(渡)라 불렀는데 한강도(漢江渡)가 네 곳 중 가장 큰 나루로 알려졌다. 곧 양화도(楊花渡), 노량진도(鷺梁津渡), 삼전도(三田渡)와 함께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한남동 앞의 나루가 바로 한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지역 토박이들은 한강 중심지는 한남동 일대라고 말하곤 한다.

 

 

한편, 한남동 지형은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해서 동쪽의 큰 마을과 서쪽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다.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 남산이 있어서 이 지역을 ‘漢’자와 남산의 ‘南’자가 합쳐져 부르게 된 것이다. 양쪽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각각의 지역 수호신을 모시는 부군당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당굿을 행해 온지 수백 년이 된 것이다.

 

작은한강 부군당이라는 이름은 건너편의 또 다른 한강 부군당을 큰집이라 여겨 붙여진 것이다. 건너편 큰한강 부군당 역시 자신들을 건너편의 작은한강 부군당에 견주어 그렇게 부르곤 하였다. 이 두 곳은 같은 날 당굿을 열어 온지 오래되었다. 2009년 기축년 정월 초하룻날에도 어김없이 양 쪽 부군당에서는 당굿이 열었다.

 

작은한강 부군당에 대한 역사적 유래는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3대째 고지기(당지기)를 맡아 부군당을 지키고 있는 최상현(1925년생)과 부인 엄옥자(1931년생)는 옛 노인들로부터 약 500여년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다.

 

 

 

애초의 부군당은 마을 위쪽 산마루 등성이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그곳에 비행장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터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부군당은 시멘트로 지어졌는데, 한 칸으로 된 당 내부에는 왼쪽 벽면의 좌측부터 용장군, 물당할머니, 정면 벽면의 왼쪽부터 부군할머니, 부군할아버지, 그리고 우측 벽면의 좌측부터 삼불제석, 산신님 등 모두 여섯 분이 모셔져 있다.

 

작은한강 부군당굿 의례는 다른 지역의 당굿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9년에 행해진 굿 순서는 주당물림 - 앉은청배(부정청배 및 가망청배) - 진적 - 산신부군 - 도당불사 - 댄주굿(부군님 내외분, 성제님, 장군님, 별상님, 신장님, 대감님 등) - 성주군웅 및 성주대 내림 - 창부 - 계면떡 팔기 - 소지 올림 - 녹음메 정성 - 뒷전 등으로 진행되었다.

 

과거에는 한강 인근에 있는 용신당으로 가서 용신굿을 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곳이 모두 개발되면서 용신당이 없어져 생략하고 있다. 당굿은 피리, 해금, 대금으로 구성된 삼잽이 음악을 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양잽이를 앉히는 경우도 있다. 윗대로부터 대물림해 온 당주 만신과 악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지역 인근에 거주하는 만신이나 악사라 하더라도 당굿에 참여하지 못한다.

 

작은한강 부군당굿 당주 만신은 구파발에 사는 조정자(1937년생, 일명 구파발 마님)이다. 조만신은 동료인 주걱턱 만신과 함께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한강 새만신(또는 도령엄마)의 신딸이었다. 신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주걱턱 만신에게 당주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죽자 9년 전 조만신에게 인계된 것이다.

 

당주 조만신은 이곳 당굿을 옥진이(정옥진, 1929년생) 만신과 함께 하여 왔으며, 이정숙(일명 한씨 딸, 1952년생)을 후계자로 두고 있었다. 당주 악사는 30여 년 동안 이곳을 드나든 박문수이며, 조만신 아들 나경우가 함께 굿음악을 연주하였다.

 

 

2009년 기축년 정초 설날아침에 작은한강 부군당굿이 열렸다. 당굿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고, 굿 중간에 떡국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시작하여 낮 3시 전에 모든 굿을 끝냈다. 당굿은 원래 지역 토박이들이 중심되어 정성껏 이루어졌었지만 근래에 들어서면서 참여한 마을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지기 최상현 옹도 병환 중이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추렴도 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진행되었다.

 

부군당 당굿에 드는 비용은 부군당 내부에 딸려 있는 두 칸에서 나온 방세와 서울시 지원금으로 충당하였다. 부군당은 마을 공동재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제물도 과거에는 고지네 집에서 정성껏 준비하였지만 나이든 고지기 부인이 할 수 없게 되자 당주에게 제물비를 따로 주어 준비토록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당굿은 몹시 쓸쓸하게 진행되었다. 주민 두 명만이 부군당을 찾아 부군님께 절을 올리고 곧바로 건너편 큰한강 부군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작은 한강 부군당이 들어서 있는 이 지역 일대가 개발될 거라는 무성한 소문 그리고 부군당 신앙에 대한 주민들의 냉대와 무관심은 작은 한강 마을굿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 하였다. 과거에는 당굿이 끝나면 고지기 부부가 걸립에 동참한 마을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반기 돌림을 하였고, 굿이 끝난 후 삼 일째 되는 날 녹음 메(신께 바치는 밥)를 지어 부군님께 올리면서 삼일 정성을 들였던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2009년은 간단하게나마 삼일 정성이 행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