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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서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29]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시대 서울(경성)에는 동서남북 네 방위에 성황당(城隍堂)을 설치하였다. 그중 서쪽 방향의 성황당이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이다. 동쪽은 자지성황당(紫芝城隍堂), 남쪽은 우수현성황당(牛首峴城隍堂), 그리고 북쪽은 동락정성황(同樂亭城隍)이다.

 

동쪽 자지성황당은 동대문 밖 창신동의 낙산(駱山, 타락산-駝駱山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고도 함) 산허리에 있었고, 남쪽 우수현성황은 용산구 동자동(옛 도동 2가)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에 우수선생(牛首先生)이란 학자가 살았던 데서 유래한 우수재에 있었다. 그리고 북쪽 동락적성황당은 북문인 창의문(彰義門) 앞 청운동에 있었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러졌기에 이를 자하문성황당이라고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의 서울 무당들은 큰굿을 하기에 앞서 네 곳의 서낭을 돌며 성황맞이를 하였는데, 그 첫 번째 방문지가 동쪽의 자지성황당이었다. 두 번째 찾는 곳이 사신성황당, 세 번째 우수현성황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동락정성황당이었다.

 

 

서쪽의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은 서대문 무악재 너머 길가에 있었다. 사신성황당이 있었던 홍제동 인근과 구파발 일대에는 유명 만신도 많았지만, 유명 신당 또한 많았다. 할미당(老姑堂), 국사당(國師堂), 금성당(錦城堂)이 그것 들이다.

 

이러한 지역적 상황과 더불어 사신성황당은 5-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신당(使臣堂)이라 불리며 서울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았다. 그러나 1960년 말을 지내고 70년대 초가 되면서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 및 도시화의 물결로 인해 많은 신당이 사라져 가는 변화와 함께 점차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사신성황당은 그 흔적을 겨우 살려내기는 했지만,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고난 속에서 옛 모습이 퇴색되었고 마침내는 정처 없이 떠도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성황당을 다른 한편으로 서낭당이라고 한다. 이 둘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성황당(서낭) 유래에는 외래설과 전래설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온 외래설의 성황 신앙은 다음과 같다. 6세기경 위진남북조시대에 양쯔강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 신앙을 발달시켰는데, 당송 대에 들어서면서 전역으로 퍼졌다. 송대 초기에 이르러 지역수호신으로서 제사하는 신앙형태가 고려에 전해졌다.

 

 

996년(성종 15)에 성황당 기록이 보이는 데서 알 수 있다. 고려 초, 지방에서 큰 세력을 갖게 된 토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 줄 종교적 제도로 성황 신앙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제례 주제권을 장악한 뒤 향촌 사회 지배권을 강화하였다.(송화섭,〈성황제〉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2009) 호족들은 성황제를 개최하여 가문과 문벌 지족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격 집단의 풍년을 비손하거나 기우제 성격의 성황제를 열어 지역주민을 결속시키고 은택을 베풀었다.

 

고려 시대 성황사는 진(津), 성(城)의 군사적 요새에 세워졌고, 12세기 중반 이후 주, 군, 현의 행정치소에 설치하여 지방관리들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성황제에서 지역수호신을 받들면서 무격으로 하여금 기풍제, 기우제로 발전시켜 나갔다. 13세기 고려왕실에서는 영험함과 신의 도움에 따라 성황신에게 존호(칭송하여 올리는 이름)와 작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1393년(태조 2)에는 전국 주요 성황신에게 차등을 두어 관직을 주고, 성리학 지배이념에 따라 성황제도 유교 예제의 적용을 받게 하였다. 태종 때에 성황은 종묘, 사직에 이어 중사(선농단 제사처럼 의식이 간단한 나라의 제사)로 편제시켜 왕권의 위계질서에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성황제는 국가 제사로서 관리들이 지내는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와 향리, 무당, 지역주민 주도의 민간성황제로 이원화되었다.(송화섭, 〈성황제〉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2009)

 

 

 

위와는 달리, 성황당(서낭당)에 대한 전래설은 한민족이 이 땅에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존재해 온 서낭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때 중국으로 유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고대사회의 천신(天神), 목신(木神), 수신(水神) 신앙 등이 오늘날의 서낭 신앙을 발전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한민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성황신앙(城隍信仰)과 융합하게 돼 오늘날과 같은 신앙 형태로 자리매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신성황당이 있었던 무악(毋岳)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안산(鞍山, 296m)과 현저동 인왕산(仁王山, 338m) 사이의 산마루 너머에 있었다.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峯)이 어린아이를 업고 나가려는 형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안산(鞍山)을 어머니 산, 곧 무악(毋岳)으로 삼아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불렀다. 안산은 또한 그 생김새가 마치 말이나 소 등에 짐을 싣는 길마와 비슷하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무악재는 서울 시내와 서대문 외곽을 연결하는 고개로 역할 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가 되면서 도심 개발과 함께 도로확장이 되자, 성황당이 헐리면서 건너편에 있었던 당시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맞은편(현재 청구아파트)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 다시 빌라가 들어서게 되어 불광동의 불광사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리고 3여 년이 지난 뒤, 1990년대가 되면서 못자리 굿당이 있었던 은평구 진관외동 272번지의 어느 집안 문중 땅으로 옮겨갔었다. 이곳 역시도 2005년 은평뉴타운 착공이 되면서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은 한때 서울 서쪽의 대표적 신당(神堂)으로 지역 사람들의 안녕을 꾀하고 무병장수를 비손하였던 민중의 안식처로서 역할 하였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라의 안녕을 위하는 거대한 굿을 거행하기도 하였고, 중국 사신이 오갈 때는 큰 굿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편, 사신성황당에는 경문을 읽는 경당(經堂, 한편으로는 불당-佛堂이라고도 부름)과 함께 무속의례를 베푸는 신당(神堂)이 각각 별도의 건물로 존재했었다. 그래서 사신성황당은 서울지역의 맹인 독경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서울맹인역리학회 총무이사 말에 따르면, 사신성황당이 한때는 맹인들의 독경의식 본거지라고 할 만큼 맹인 독경인들이 많이 애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2005년 8월 11일 대담) 서울 맹인 독경인들이 읊는 독경은 우리나라 3대 성악인 판소리, 범패, 가곡 못지않게 훌륭한 음악성을 드러내는 종교의례악이기도 하다. 2017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약 50여 명의 전문 맹인 독경인들이 이를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