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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또 하나의 국방유적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강화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마니산 꼭대기에는 참성단이 있어 한민족의 시원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산성이 있다. 지금 삼랑산성 안에는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다. 한반도의 지역을 다 둘러보아도 한민족의 수난기에 나라를 지키는 보루가 되었던 역사의 고장으로 강화만한 곳은 드물다. 강화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바다가 되는 곳에 있는 섬으로, 두 강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합해서 강화도와 육지사이로 좁은 물길에 거센 강물이 흐르고 있어 지도만 보면 업드리면 건너 뛸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지만, 아무리 강력한 대군의 침략일지라도 강화도로 들어서기만 하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의 징기스칸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멀리 유럽까지 단숨에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기병일지라도, 해전에는 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고려 무신정부는 송도(개성)에서 바로 건널 수 있는 강화로 서울을 옮겨, 몇 차례 몽골군과 대접전을 벌이면서 공방을 주고 받으며 전쟁을 하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30여년을 끈질기게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의 승병장군이었던 '김윤후'는 대군을 이끌고 전 국토를 초토화하는 과정에서 처인성(용인)에서 대치하다 몽골정군 '살리타'를 화살 한방으로 처단하였고, 대장이 죽은 몽골군은 바로 퇴각하기도 하였다. 몽골과 항쟁기 강화도로 피난 왔던 고려왕과 왕비들은 이곳 강화에서 생을 마감하여 강화에는 4기의 고려왕과 왕비의 릉이 있다. 이들을 살펴보면, '석릉'은 희종의 릉, '홍릉'은 고종의 릉, '공릉'은 강종의 왕비 '원덕태후'의 릉, '가릉'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릉이다.

 

그런데 강화에는 강화 본섬에서 가깝게 떨어져 큰 섬이 또 있으니, 하나는 불교에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의 상주처로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가 있고, 또 하나는 조선시대 향교와 경기수군의 본영인 수군영이 있었던 '교동도'다. 

 

본래 섬이었지만 '석모도'와 '교동'도는 최근에 다리가 놓여서 이제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교동도'는 한국의 많은 섬 중 그리 큰 섬이 아님에도 조선시대 전국의 군단위 이상 큰지역에만 있던 관립학교인 향교가 설치되어 그 위상이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에 망한 뒤, 교동도 내 구축했던 교동읍성은 더이상 국가가 돌볼 힘이 없어 세월과 함게 서서히 폐허가 되어갔다. 교동읍성은 그 성벽의 길이가 430m에 이르는 작은 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5m에 이르는 방어진지로 충분하였다.

 

이곳에는 경기수영의 본진이 설치되고, 성안에는 교동도호부가 설치되고 장수로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였다. 읍성 주위에는 성문에 옹성을 갖춘 성문이 3개가 있었다.  성문의 위에는 문루까지 갖추어 그 위용도 있었으나, 나라가 망하고 난 뒤 성벽은 서서히 허물어져 갔고, 성안에 있던 수군본진도 무너져 없어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살면서 성벽의 돌을 헐어다 자기집 담을 쌓고, 큰돌은 골라서 주춧돌로 쓰기도 하였다. 성의 주 출입문인 성문도 무너지고 성문위 문루도 비바람에 퇴락하고 무너져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아픈 역사의 현장이 우리시대에  다시 국방유적으로의 중요성을 깨달아 옛 자취를 조사 발굴하여 확인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 할 일이 많지만, 최근 겨우 성문의 형태만 알 수 있었던 교동읍성의 남문인 홍예문이 복원되고, 그 위에 자리했던 기와집 누각인 문루도 복원되었다.

 

앞으로 교동읍성 전체를 복원하려면 할 일이 매우 많지만, 역사현장의 자취를 발굴조사하여 본래 모습을 회복하여,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에서 서울의 길목을 지키는 국방유적으로서의 강화 교동읍성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기회가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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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