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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제주도 유배가 만들어준 김정희 추사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3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으뜸 글씨체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 그리고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으뜸 경지에 오른 인물이지요. 하지만 추사는 평생 승승장구하고 산 것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9년, 함경도 북청에서 2년의 혹독한 유배살이를 견뎌야 했습니다. 더구나 제주 대정현에서의 귀양은 위리안치(圍離安置)라 하여 가시울타리 안에서 목숨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다리를 제대로 뻗을 수 조차 없이 좁은 것은 물론 거미와 지네가 기어다니는 방안에서 살아야 했지요. 또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은 추사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추사는 그런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했으며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 속 필체를 연구한 각고의 시간, 그것도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는 화가 날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어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는 ‘세한도’도 이 때 그렸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고 하지요. 특히 추사가 유배가기 전에 썼던 해남 대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와 유배 뒤에 쓴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비교하면 재미나는데 전의 것은 살지고 기름기가 흐르는데 견주어 유배 뒤에 쓴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살과 기름기 대신 뼈만 남은 듯한 단단함이 느껴진다는 평가입니다. 이를 보아도 그의 예술과 학문의 완성은 제주도 유배가 만들어주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