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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은 없고, 탑비만 남아

원주 법천사터에서 지광국사 흔적을 찾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법천사는 원주에 있었던 오래된 절이었다. 법천사는 임진왜란 당시 방화로  폐사되면서 수백년 동안 이어온 절에 대한 기록도 모두 사라져 그 정확한 창건연대도 알 수가 없지만, 옛 역사기록에 따르면 신라말에 이미 있었던 절임에는 틀림없다.  법천사는 고려초 지광국사(, 984∼1067)가 생존시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그 때 한국 불교는 지상에 화엄불국토를 꿈꾸었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화엄종이 대세를 이루어 법천사는 유식학을 중심으로 한 화엄사상의 한 맥을 이루는 법상종의 절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었지만, 이곳에는 법천사에서 출가한 뒤 고려의 국가적 스승으로 살아서 국사로 올렀던  지광국사가 가르침을 크게 폈던 곳으로 이곳에는 지광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지광국사현묘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지광국사현묘탑비가 남아있었다. 

 

지광국사는 그 깨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는 신라말 이후 선종의 큰스님들에게 임금들이 내린 많은 승탑 가운데 비교할 만한 비슷한 양식이 없다. 이련 양식은 이전에도 전혀 볼 수 없었고, 이 후로도 볼수 없는 매우 화려하면서도 이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그의 설법집과 화엄경ㆍ금강경 ㆍ법화경을 비롯한  경전에 대한 해설 등도 많이 있었을 것이지만, 고승의 행적과 법어집 등이 자세히 전하는 것이 없어 매우 아쉽다.

 

오천여 평의 법천사터는 오랫동안 논밭으로 남아있었고, 산비탈  한 모퉁이에 외롭게 남아있던 지광국사의 승탑과 탑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로 조사되어, 그에 관한 자세한 보고가 일본왕실에 전해졌다. 그리되자 그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한 일본인들이 이를 왕실의 장식품으로 활용하고자 무단반출돼 버렸다. 그러나 원주지역의 유지들은 그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다시 환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광국사현묘탑은 환국하여 돌아와서도 본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복궁의 한 모퉁이에 놓여지게 되었다. 경복궁의 한 모퉁이에는 지광국사현묘탑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폐사지의 승탑과 석탑들, 석비들을 모아서 전시하였다. 이들은 궁궐의 귀퉁이에서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선조들의 작품으로, 정신적인 가치는 무시된채, 눈요기 장식품이 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었었다. 

 

그렇게 제자리도 찾지못하던 지광국사현묘탑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포탄을 직통으로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깨져 널부러져 있던 지광국사현모탑의 현재 모습은 전쟁의 포화속에 산산조각 났던 것을 하나 하나 맞추고, 부족한 부분은 시멘트로 성형복원하여 그나마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지광국사현모탑과 함께 있던 지광국사 탑비는 본래 있던 법천사지 경내 깊숙한 곳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탑비의 뒷면이 많이 상했지만, 다행히 앞면과 탑을 받치는 거북돌 귀부(龜趺) 탑의 뚜껑인 덮개돌 이수(羸瘦)는 손상되지 않고 남아서 천년전에 새긴 거북과 용조각은 지금도 한국의 어떤 승탑보다도 생동감이 넘친다.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를 보면서 후손으로써 잘 지켜내지 못함에 아쉬움을 느끼며, 그나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에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광국사 행적(984년 출생 1067년 열반)

속성은 원(元) 씨이며, 어린시절 이름은 수몽(水夢), 출가후 받은 법호는 해린(海麟)이다. 그는 법천사 관웅스님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해린은 화엄학을 공부하여 1001년 숭교사(崇敎寺)를 개창하고 명성을 얻었는데, 그 때 나이는 불과 18살이었다. 이후 화엄학의 한 가지인 유식학을 주로 공부하는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해린은 1004년 21살에 대선에 급제하여 법상에 앉아 불자(拂子: 고승이 설법시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잡고 좌우로 휘두르기도 하였다. 해린은 이때부터 고려 성종ㆍ목종ㆍ현종ㆍ덕종ㆍ정종ㆍ문종에 이르는 임금을 거치는 동안 대사의 칭호를 받으며 궁에서도 많은 설법을 하며 살아왔다.

 

문종은 해린스님이 개성 봉은사에 있을 때 찾아와 국사로 추대하였다. 이때는 1058년 75살 때의 일이다. 비문에 따르면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훌륭한 문장이 되어, 북송의 문장가 혜거도 혼비백산하였다고 한다. 또 그가 읇은 문장은 하는 말마다 음운이 잘 맞아 중국의 음운학의 대가인 담빙은 자신의 실력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화 문장 필법에도 정통하여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사는 나이 84살에 자신의 명이 다 했음을 알고 자신이 처음 출가했던 이곳 원주 법천사로 돌아와 머물다가 열반에 들었다. 이에 문종은 그의 시호를 지광(智光, 지혜가 밝게 빛나는 분)으로 그의 탑호를 현묘(玄妙, 깨달음이 깊고 오묘한 분)라 내리고 비문을 지어 세웠다. 비문을 짓는데 참여한 대신들이 자신의 실력을 다 하여, 지광국사의 행적을 최고의 극찬과 명문장을 만들어 비문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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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