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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세계 첫 공해병 미나마타병의 시작과 경과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30]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1906년 무렵 일본의 규슈 지방 남단 구마모도 현의 미나마타시(水俣市) 근처에 카바이드 공장이 설립되어 1908년부터 조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이 공장에서 화학비료를 생산하면서 미나마타시는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최초 공장이 설립된 후 40여 년이 지난 1953년 무렵부터 이 공장 근처에 있는 미나마타만의 해안 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병이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바닷가에 바닷물고기가 죽어 떠올랐으며 갈매기가 균형을 잃고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육지에서는 고양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혼수상태에 빠지다가 죽기 시작했다. 이상한 증상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 어민들은 갑자기 걸음이 이상해지고 손발이 마비되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야가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것 같이 좁아지며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이 병은 가난한 어민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것은 기이한 병이 발생한지 약 4년 뒤인 1957년 4윌 1일이었다. 당시 아사히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기이한 병의 증상은 일본 뇌염과 같이 고열이 발생되고 수족마비, 중추 신경의 침해에 의한 언어ㆍ시청력ㆍ운동 기능 등의 장애가 일어나 폐인이 되는데, 사망률이 30%나 되었다. 이 지방 바다에서 잡은 어패류가 기이한 병의 감염원으로 추축되었는데, 1953년부터 1956년까지 54명이 발병하여 17명이 사망하고 3명은 완치되었다. 그렇지만 환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환자들은 대부분 병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 환자의 직업은 어민이 압도적이고 발생지는 대부분 미나마타시에 인접한 해안지방이었다.

 

의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병이 나타나자 정부에서는 ‘기병(奇病)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역학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 결과 이 병은 수은화합물인 메틸수은의 중독 증세임을 알아냈다. 구마모토 대학 연구팀은 메틸수은의 출처를 추적하였는데, 병이 발생한 지 3년 만인 1956년에 미나마타에 있는 화학비료회사인 신일본질소공장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공장폐수에 포함된 수은이 바다에 흘러들어 물고기와 조개를 오염시키고 오염된 어패류를 먹은 주민들이 수은 중독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미나마타병은 세계 첫 공해병으로 기록되었다.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은 공해병의 대표적인 사진으로 수질오염 교과서에도 나온다. 또한 미나다타병의 원인이 수은 중독이라는 단순한 사실 관계는 수질오염 관련 시험문제로 단골로 출제되고 있다.

 

 

그런데, 미나마타병에 걸린 환자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회사 측은 처벌을 받았을까?

 

처음에는 회사와 일본 정부는 수은을 병의 원인으로 인정하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명확한 인과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버텼다. 보상과 치료를 요구하는 환자들은 결국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늘어나고 보상을 둘러싼 대립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일본정부가 마지못해 미나마타병을 공해병으로 인정한 것은 최초 발병 후 14년이 지난 1967년이었다. 사망자 일인당 4백만 엔의 보상금이 주어졌고 정부에서는 추가로 환자 인정 신청을 받았다. 미나마타병 환자동맹은 신일본질소 사장과 공장장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살해 혐의로 고소하였으나 재판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최초 발병 후 26년이 지나서 1979년에 구마모토 재판소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에서 공해병으로 인정한 지 21년이 지난 1988년까지 미나마타병 심사위원회에 환자 인정을 신청한 사람은 14,00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환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2,600명이었다. 그 동안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이 병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668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미나마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미나마타만의 바다에 침전된 수은의 총량은 200톤에 달하는데 수은은 독성물질로서 수은의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1975년에 일본 정부에서는 특별히 오염이 심한 45만평의 해저를 준설하기로 결정하고, 그 후 16년 동안 오염된 흙을 파내어 특수강철판을 깐 매립지에 옮겨 담았다. 오염된 흙을 준설하고 매립하는 데에 500억 엔의 비용이 들었다. 미나마다병의 원인자인 신일본질소회사는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공사비의 2%만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채권발행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환자 인정 신청은 계속되었고 보상액을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되었다. 미나마타병이 나타난 지 무려 43년이 지난 1996년에 최종 타협이 이루어졌다. 환자 인정을 받지 못한 이른바 미인정 피해자 1만 3,000명에게 일시금 260만 엔씩을 지급하는 대신 일체의 소송과 보상을 마무리 짓는다는 조건이었다. 보상금은 적었지만 보상을 받을 사람들이 자꾸만 나이 들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다. 그동안 오염된 물고기의 이동을 막기 위해서 쳤던 바다 속 그물도 철거되었다.

 

오염된 준설토를 파묻은 땅 위에는 1990년에 ‘미나마다병 자료관’이 만들어졌다. 미나마다병 환자의 후손들과 미나마다 시민들은 미나마타병 자료관을 방문하여 세계 첫 공해병의 역사와 교훈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