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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일본 교토를 세운 간무왕의 어머니 백제여인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유적지, 오오에왕릉, 헤이안신궁, 히라노신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헤이안쿄(平安京, 교토를 말함)는 도래인(渡來人, 주로 고대 한국인을 이름)들의 힘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문화의 기초는 모두 이들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이후 조선침략을 계기로 전후(戰後, 1945년 이후) 조선을 경시하는 경향이 짙다. 도래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헤이안시대(794-1192)는 백제출신 어머니를 둔 간무왕(桓武天皇) 때부터 비롯되었다. 간무왕의 어머니인 백제여인 고야신립(다카노노 니이가사, 高野新笠)는 자신이 맛보지 않았던 민족 차별(오늘날)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일본의 저명한 수필가 오카베 이츠코(岡部 伊都子, 1923–2008) 씨가 《여인의 경(女人の京), 일본도쿄 후지와라서점 출판, 2005》에서 한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간무왕(桓武天皇)의 어머니 고야신립(高野新笠)은 백제 왕족으로 제49대 고닌왕(光仁天皇)의 황후가 되었다. 틀림없이 희고 고운 조선의 피부를 가진 꽤 아름다운 미녀였을 것이다.”

 

 

 

생전에 수필집을 비롯한 책, 90권을 쓴 오카베 이츠코 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일본 쪽 기록은 차고 넘친다. 고대기록까지 갈 것 없고 《아사히일본역사인물사전(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1994. 아사히신문사 발행)만 봐도 고야신립에 대해 이르길 “나라시대 고닌왕의 왕비, 간무왕의 어머니. 화을계와 토사진주의 딸, 아버지 쪽은 도래계 씨족으로 백제무열왕 자손(奈良時代, 光仁天皇の妃。桓武天皇の母。和乙継と土師真妹の娘。父方は渡来系氏族で, 百済武寧王の子孫) ”으로 나와 있다.

 

일본의 제50대 간무왕(桓武天皇, 간무덴노)의 어머니인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무덤을 찾아 간 것은 지난 12월 22일(토) 오후였다. 숙소인 교토 오오미야(大宮)역에서 가츠라(桂)역까지는 전철로 2개역이라 10분 정도 걸렸지만 가츠라역에서 고야신립 무덤이 있는 오오에 릉(大枝陵) 까지는 1시간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기다려야해서 시간이 다소 걸렸다. 무덤으로 가는 길목의 구츠카케(沓掛) 버스정류장에는 꽃집 등이 없어 미리 가츠라역에서 생화 한 다발을 샀다.

 

 

 

12월 중순이 넘은 날씨지만 이날 날씨는 한국의 11월 중순처럼 느껴져 춥지 않은 적당한 날씨였다. 고야신립 무덤으로 가는 길은 주택가를 끼고 산속으로 난 길을 10분 정도 걸으면 나타나는데 올라가는 들머리에는 고야신립의 무덤을 알리는 빗돌이 서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왔을 때는 무덤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흙이 무너져 내렸으나 이번에 가서 보니 시멘트로 계단 정비를 해서 깔끔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대나무 숲 속으로 난 돌계단 중간쯤에 지난 여름 태풍으로 쓰러진 소나무가 있어 통행이 쉽지 않았다.

 

 

 

“여기가 교토를 수도로 정한 간무왕(桓武天皇)의 어머니 무덤이런가? 그다지 넓지 않는 돌계단이 쭉 위쪽으로 나 있다. 거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듯 무덤의 참배길을 오르려는 나를 근처 주택가를 거닐던 사람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다보고 있다.” 던 수필가 오카베 이츠코 씨는 말을 기억하며 고야신립 릉(陵) 앞에 섰다. 하늘은 다소 흐렸지만 무덤 주변을 감싼 대숲에서 잔잔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준비해간 생화 화분을 무덤 계단에 올리고 잠시 묵념에 잠겼다. 비록 고야신립 황후의 고국인 백제는 멸망했지만 황후의 존재는 일본의 사서(史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제49대 광인왕(光仁天皇, 709-782)의 후궁으로 있다가 정식 황후가 된 고야신립은 아들 간무왕(桓武天皇, 737-806)이 제50대 왕이 되면서 왕의 어머니로서 781년 황태부인(皇太夫人)의 지위에 올랐다. 간무왕은 그때까지 나라(奈良)가 수도였던 것을 교토(京都)로 옮겼다. 바야흐로 교토시대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 교토시대를 가리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라고 하는데 이 때야말로 일본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던 시기이며 그 중심에는 백제여인의 아들인 간무왕이 있었다. 해마다 교토에서는 10월 22일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하는데 이는 서기 794년 간무왕(桓武天皇)이 수도를 지금의 교토(京都)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메이지시대부터 시작한 마츠리다.

 

고야신립 무덤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아들인 제50대 간무왕의 사당인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이다. 도리이(鳥居, 일본 신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타내는 의식적인 관문)의 크기만 해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헤이안신궁은 오늘날도 교토 시민들이 간무왕을 ‘교토의 신(神)’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토의 3대 마츠리로는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화려한 고대 의상을 입은 참가자들이 교토 시내를 2~4시간 행진하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교토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에 견줄 수가 없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다만,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가장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지다이마츠리(時代祭)로 이 축제는 간무왕이 교토로 수도를 옮긴 것을 기념하여 메이지시대인 1895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2018) 123년째를 맞았다. 지다이마츠리(時代祭)에 참석해보았던 글쓴이는 백제여인의 아들 간무왕이 ‘교토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현장을 보고 감회가 컸었다.

 

 

간무왕의 사당인 헤이안신궁을 나와 마지막으로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의 사당인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찾았다. 히라노신사는 어떤 곳인가? “히라노신사 제신(祭神)은 백제계의 이마키, 구도, 후루아키, 히메의 4신이다. 794년 이마키신을 다른 3신과 함께 간무왕이 나라(奈良)로부터 지금의 터전으로 옮겨 왔다” - 《일본사사전(日本史辭典), 日本 角川書店, 1976》 -

 

그런가하면 일본 위키사전에는 “히라노신사의 창건은 헤이안경 천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원래는 간무왕의 생모인 고야신립의 조상신(간무왕의 외가쪽 신)으로 헤이죠쿄(나라시대 궁전)에서 제사 지내던 사당이었으나 헤이안쿄(교토시대 궁전) 천도에 따라 황실 가까이로 옮겨(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이 시초라고 추측된다. (平安京遷都頃まで創建が遡るとされる神社で、近年の研究によると、元々は桓武天皇生母の高野新笠の祖神(桓武天皇外戚神)として平城京に祀られた神祠であったが、それが平安京遷都に伴って大内裏近くに移し祀られたことに始まると推測されている。)"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위키사전에서는 히라노신사의 유래를 간무왕의 생모인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조상신을 모시던 신사(사당)였으나 간무왕이 교토 천도시에 궁전 가까이로 사당(히라노신사)을 모시고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부분의 ‘추측된다’ 라는 말이다.

 

이러한 서술태도는 일본인들이 단정을 피하려고 쓰는 흔한 버릇이다. 위키사전의 서술대로 '추측'이라면 왜 나라(奈良)에 얌전히 있던 사당(신사)을 교토로 옮겨왔는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당이란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고는 옮기지 않는 법이다.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겼으니 당연히 황실에서는 궁전 가까이에 조상신을 모시고자 사당을 옮긴 것이다. 그 사당이 지금 교토에 있는 히라노신사이다.

 

헤이안시대 말기에 나온 '후쿠로조시(袋草紙), 1156-1159)'의 노래집에는 “고닌왕의 황태자인 간무왕의 생모 고야신립의 조부는 히라노신의 증손이다.(白壁王の皇子の御母の祖父は平野神の曾孫である)”라고 해서 히라노신사가 백제여인 고야신립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히라노신사의 입장을 보면 경내의 유래판에 “에도시대 국학자인 한노부토모(伴信友)가 《번신고(蕃神考)》라는 책에서 히라노신사의 제신(諸神) 가운데 이마키(今木神)은 백제왕이다라고 했으나 지금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라노신사의 주장에 불과하다.

 

한노부토모(伴信友, 1773-1846)라고 하면 에도시대 4대 국학자의 한 사람이다. 한노부토모가 근거 없이 “이마키신은 백제왕이다(今木神は百濟王なり)”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고대문헌을 충분히 참고하여 내린 견해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상황임에도 히라노신사 쪽이 ‘히라노신사와 백제는 무관하다.’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메이지시대의 조선 경시 풍토에 물든 것일까? 안타깝다.

 

 

어쨌거나 눈부신 교토의 발전을 이룩한 왕이 제50대 간무왕(桓武天皇)이고 그의 어머니가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이요, 간무왕의 사당은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이고, 어머니 고야신립의 사당이 히라노신사(平野神社)라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일뿐이다.  교토를 찾는 이들이 있다면 이 세 군데를 찾아 보는 것도 뜻 깊을 것이다.

 

 

【 찾아 가는 길 】

 

1) 고야신립 무덤(大枝陵, 오오에료) : 京都市西京区大枝沓掛町

교토에서 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으나 지하철의 경우 가츠라(桂)역에서 내려 역 앞에서 2번 버스 타고 20여 분 거리에 있는 구츠카케(沓掛) 정거장에서 내린다. 진행 방향으로 50미터 쯤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길 따라 50미터 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다리지나 다시 100미터 가면 도로가 하나 나오는데 왼쪽으로 꺾어 조금 가면 “고야신립릉”이라는 돌 비석이 나온다. 돌 비석 계단 위 산길로 끝까지 150여미터쯤 올라가면 무덤이 나온다. 꽃을 준비하고 싶은 사람은 가츠라(桂)역 구내 꽃집을 이용하면 된다.

2) 헤이안신궁(平安神宮) : 京都府京都市左京区岡崎西天王町97

교토 지하철 도자이선(東西線) 히가이야마(東山駅)에서 내려 10분 거리

3) 히라노신사 (平野神社) : 京都府京都市北区平野宮本町1

JR교토역에서 시영버스 <205>, <50> 번 타고 약30분 거리, 기누가사고마에(衣笠校前) 하차 북쪽(내린 방향)으로 걸어서 3분 거리

 

교토에서 묵을 경우 아침 일찍 서두르면 이 세군데를 모두 돌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