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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갈돌’과 ‘갈판’으로 갈은 것은?

[큐레이터 추천 유물 69]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어느 박물관을 가든 신석기시대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에서 꼭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한 쌍을 이루는 ‘갈돌’과 ‘갈판’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서도 부산 가덕도・서울 암사동・안산 신길동 유적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갈돌과 갈판을 볼 수 있습니다.

 

갈돌은 긴 타원형으로 아랫면을 보면 수차례 갈려 평평하고 매끈합니다. 갈판은 갈돌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넓적한 판으로 직사각형 또는 타원형을 띠며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휘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긴 갈돌의 양 끝을 손으로 잡고 앞뒤로 밀다 보니 갈판이 자연스레 휜 것입니다. 이처럼 갈돌과 갈판은 사용 흔적으로 볼 때 무엇인가를 가는 데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갈았을까요?

 

 

달라진 환경, 풍부해진 먹거리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의 지형이나 동식물상이 현재와 비슷하게 변하는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활과 화살촉, 토기 같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 냈습니다. 특히 구석기시대와 달리 한반도에서는 바닷가에 살면서 해양 자원을 활발히 활용했던 모습을 보입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는 고래 뼈, 조개껍질 등 이전 시기에 보이지 않던 다양한 먹거리의 잔존물이 발견됩니다. 흔적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먹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현존하는 외국의 수렵채집 생활 방식을 바탕으로 신석기시대에도 식물 채집은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식물 채집과 농사짓기

 

신석기시대에 어떠한 식물들을 채집했는지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습지에서 발견되는 증거들로 미루어 도토리, 살구, 가래 등 여럿 야생 식물을 채집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석기시대에는 농사도 짓기 시작했습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조, 기장 등 재배 식물의 유체(有體)와 경작유구(耕作遺構), 식물 뿌리를 캐거나 땅을 파는 데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 등이 그 증거입니다. 갈돌과 갈판은 이렇게 채집한 식물의 열매나 재배한 곡물의 껍질을 까거나 갈아서 가루를 만들기 위한 도구였을 것입니다.

 

청동기시대와는 달리 신석기시대의 갈돌과 갈판은 재배 식물보다는 주로 채집한 열매를 가공하는 데 쓰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생계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재배 식물에 의존한 농경 사회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농경 사회는 농경과 관련된 석기가 다수 출토될 뿐만 아니라 재배 작물의 종류와 수량이 많아지고 수리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논과 밭 등이 발견되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짐작합니다.

 

신석기시대 최대 규모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발견

 

미루어 짐작해 왔던 신석기시대 갈돌과 갈판의 용도를 잘 보여 주는 유적이 2004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배와 노,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편(片) 등 한반도 신석기시대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또는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창녕 비봉리 유적입니다. 이 유적에서는 상태가 매우 양호한 도토리 저장 구덩이가 18개나 확인되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중 4호 저장 구덩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4호 저장 구덩이는 길이와 너비가 1m 안팎이며, 깊이는 0.71cm입니다. 단면은 입구가 살짝 오므라드는 플라스크(목이 길고 몸은 둥근 화학 실험용 병)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바닥에는 다량의 도토리가 흩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얽혀 있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안에서 발견되는 나무들은 저장 구덩이의 위치를 표시하고 도토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덮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를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도토리는 떫은맛을 내는 타닌(Tannin)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그대로 먹기 어렵기에 이를 제거하려면 일정 시간 물속에 넣어 두어야 합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굉장히 슬기로워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저장 구덩이를 만들어 떫은맛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도록 한 다음 장기간 보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혹시나 도토리가 물에 쓸려 나갈까봐 굵은 목재나 돌을 이용해 입구를 막고 바닥에 쐐기를 막아 묶어 놓았던 것입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유독 도토리가 잘 발견되는 이유는 이러한 보관 방법 때문입니다.

 

창녕 비봉리 유적 도토리 저장 구덩이 가운데 10호와 11호에서는 깨뜨려 부서진 다량의 도토리 껍질이, 12호에서는 갈돌과 갈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큰 구덩이에서는 실제로 갈돌과 갈판을 이용해 도토리 껍질을 벗기는 등의 가공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갈돌과 갈판

 

갈돌과 갈판은 농경 사회에 들어선 청동기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벼 등 작물 재배가 많아지기 때문에 도토리 같은 견과류뿐만 아니라 작물을 가공하는 데도 많이 쓰였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루어진 사용흔 분석과 잔존 녹말 분석에 따르면 청동기시대 갈돌과 갈판은 볏과 식물의 탈곡과 제분, 견과류 가공 등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져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갈돌과 갈판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용 횟수가 점차 줄어드는데, 이는 절굿공이의 사용 및 보급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제 절굿공이는 청동기시대 후기 유적에 해당하는 안동 저전리 유적과 대구 매천동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이진민) 제공

                                    위 내용과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 없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