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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신라 으뜸 절 황룡사터 구층목탑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월성(月城)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던 이곳은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인 황룡사가 있었다. 칠처가람이란 세상에 온 석가모니불보다 먼저 있었던 과거칠불(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불)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신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기 전부터 이미 과거부처님들이 왔던 불국토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증거로 신성시 하였던 절들이다. 신라 칠처가람은 지금의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지,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새로이 궁궐을 짓기 위하여 터파기를 하던 중 갑자기 황룡이 나타나 궁궐짓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절을 짓게 되었으며, 절이름도 황룡이 나타났다하여 황룡사가 되었다. 황룡사는 553년 궁궐로 착공하여 절로 바꾼 뒤 569년 완공하였다. 그렇게 지어진 황룡사는 신라를 지나 고려 후기인 몽골의 침략시까지 그대로 남아있다가, 몽골의 방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황룡사를 불사른 것은 고려인들이 부처님에 의지하여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고려인들이 의지하던 부처님이 늘 계시고 보호한다는 믿음의 힘은 바로 황룡사와 고려대장경이었기 때문이다.

 

황룡사는 발굴 결과 전체 넓이가 약 25,000평에 이르는 넓은 절로 목재로 된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주춧돌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황룡사의 존재를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황룡사는 절의 중심공간인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경복궁의 중심을 둘러싼 회랑처럼 절의 중심 공간을 회랑으로 둘러싼 구조로 되어있다. 이곳은 부처님을 모신 공간으로 세상에서는 왕을 모신 궁궐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였던 것이다.

 

황룡사에는 신라왕실이 삼보로 여기던 것 중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장육존불이고, 다른 하나는 황룡사의 구층목탑이었다. 신라의 삼보 중 또 다른 하나는 '진평왕의 옥대'로 이 옥대는 고려까지 이어졌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신라의 마지막왕으로 왕건에게 항복했던 경순왕이 가지고 있다가 그가 죽은 뒤 그의 능에 부장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 황룡사의 중심에는 구층목탑이 세워졌는데 이는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어떤 신인을 만났을 때 그가 하는 말이 "신라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천왕의 명을 받아 이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신라에 돌아가 구층목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모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이며, 신라의 왕업이 길이 길이 보존되고 태평할 것이며, 팔관회를 베풀면 주변국 외적이 처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하는 것이었다.

 

자장은 급히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간청하였고 구층목탑을 짓기 위하여 명장을 찾던 중 신라에서는 찾지 못하고,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에서 명장 아비지를 긴밀히 초청하여 구층목탑을 짓고자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아비지가  그렇게 지은 구층목탑은 총 높이가 225척으로 현재의 길이단위로 보면 86m 정도였다고 한다. 그 높이는 현재 아파트 높이로 볼 때 30층 높이에 해당한다.  

 

자장율사는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 100과도 함께 구층목탑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없어진 뒤, 이곳은 폐허가 되었고 오랜세월 흙이 덥혀 논밭으로 변하였는데 다행히도 심초석 위에 거대한 뚜껑돌이 그대로 있어서 자장율사가 봉안한 불사리는 그대로 있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불교유적들이 훼손되었으나 그런 피해도 받지 않고 세월이 흘러 800여년이 지난 1964년 논밭이 된 이곳에 도굴꾼이 황룡사의 역사를 알고 황룡사의 사리를 훔치기 위하여 수십톤 크기의 뚜껑돌을 밀치고 훔쳐갔다. 그러나 다행히 도굴단을 일망타진하여 그 사리와 사리함을 회수하였다고 한다. 이제 찬란했던 황룡사 여러 전각들과 구층목탑은 사라졌지만 이곳에 부처님을 모시듯 봉안했던 사리함과 사리를 회수하여 황룡사의 역사적 기록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구층목탑은 착공한지 불과 1년 6개월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정말로 경이적인 공사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감히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꿀떡 같이 많지만 구조적 안전성을 보장할 수가 없어서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1400년 전 우리조상들이 그 복잡한 건축물을 전광석화처럼 지어냈다니 지금 한국전통건축을 설계하는 기술자의 한 사람으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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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