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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했던 신채호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1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쳐서 죽이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이는 역사가ㆍ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김원봉 의열단의 요청으로 집필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앞머리에서 한 말입니다. 오늘 21일은 그 신채호 선생이 1928년 일경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한 날(1936년)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26살 젊은 나이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펼쳤습니다. 또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드높였지요.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으며,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지만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뽑히자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기도 했지요.

 

선생은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고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를 집필하는 등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면서 선생은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라며,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라고 하여 강력한 민족 주체성을 보인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