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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해방과 훈장 아버지의 죽음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4]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아버지네집은 8칸짜리 큰 초가집이었는데 뽀얀 흙으로 집벽과 가마목(부뚜막)을 곱게곱게 매질하여 아주 깨끗해 보이더란다. 집에는 재산이란 없지만 억대우(덩치가 매우 크고 힘이 센 소) 같은 삼형제가 부모님들을 모시고 소작농생활을 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화기로운 대가정이더란다.

 

아침에 엄마가 정주 칸(부엌)에 나타나니 다섯 살짜리 녀자애가 쭁그르 달려와 엄마품에 매달리며 “엄만 어데 갔다 인제야 왔니?” 하면서 까만 눈에 맑은 빛이 흘러넘치고 엄마 뒤만 졸졸 따라 다니더란다. 엄마는 부끄러웠으나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처음엔 동생처럼 돌보던 것이 점점 착한 엄마로 되었다는구나!

 

시집간 지 며칠 안 된 어느 하루 엄마는 시어머님과 함께 정주 칸에서 삼을 삶고 있는데 난데없이 웃방에서 글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엄마는 그 글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더란다. 하여 저도 몰래 살금살금 다가앉아 문틈으로 훔쳐보았는데 저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시어머님을 쳐다보았단다. 글쎄 새서방님이 흰 두루마기에 팔각모자를 쓰고 올방자(책상다리) 틀고 앉아 위엄스레 서당훈장질하고 있더란다. 엄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멍해 있는데 시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그래, 너도 글공부하고 싶냐? 너는 네 서방님을 잘 섬겨야겠다. 이것이 너희 본분이니라.”

 

엄마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그저 “예! 예!”하고 대답만 하였단다. 그러나 속으론 “서방님은 저렇게 글도 다 아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라 어쩌지?”하면서 미안한감만 들더란다. 그 뒤에 엄마가 본 남편은 늘 책을 보고 붓으로 글을 쓰시더란다. 약도 짓고 훈장질도 하시더란다.

 

28살 나는 남편은 충주김씨 가문의 족장이시고 일 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충주김씨 종가회의를 집행하시더란다. 손님이 7~80명, 혹은 100명 가까이 모였을 때에도 그 점심식사준비는 주로 엄마 몫이었단다. 시어머님의 가르침 덕분이 컸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조용한 곳에서 늘 엄마 손을 덥석 잡아도 주고 품에 꼬옥 안아도 주면서 “대단하오. 수고하오……” 하시면서 칭찬을 보내주시더란다.

 

세월이 흘러 큰딸애도 시집가고 웃어르신네들도 모두 하늘에 모신 그 뒤였단다. 엄마는 아이 넷인 엄마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당신 많이 고생하고 있소. 이 애들을 보오. 참 기특하오. 우린 이 애들을 꼭 공부 잘시키기오.”하시면서 애들의 머리를 쓰다듬더란다. 그러면서 “우린 꼭 잘 살거요……”하여 엄마는 늘 아버지와 함께라면 힘든 일이 없었다하는구나.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아버지는 엄마를 보구 만면에 웃음지으시며 “여보, 드디어 이 날이 왔소. 일본이 망했다오. 전쟁은 끝났소.”하시더란다.

 

항일아동단에 가입한 시동생도 “오라지 않아 지주놈들도 청산하고 땅도 몰수한답니다.”하여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아버지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셨다는구나! 정말 그 뒤 날마다 좋은 일만 있더란다. 마을 동, 남, 서쪽에 살던 왕가, 고가, 시가 세 지주에게 꼬깔모자를 씌우고 촌정부 마당에서 청산, 공소대회를 하곤 땅을 몰수한다고 선포하더란다. 그리고 그 후엔 또 토지개혁도하고 엄마네도 땅을 분배 받았단다.

 

모두가 이렇게 기쁨으로 들끓고 있었는데 1946년 온 마을에는 전염병이 휩쓸었단다. 일본놈들은 투항하고 철퇴하면서 세균을 뿌려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에로 내몰았다하는구나! 이 세균전에 의해 우리 온 집은 “머저리병”이라는 병에 걸려 마을에선 새끼줄을 쳐서 우리집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쳤더란다. 정부에서는 아버지를 학교교장으로 임명하였지만 아버지는 병석에서 점점 위태해 가시더란다.

 

셋째삼촌이 그런대로 드나들면서 매일 죽이라도 날라다 주셨다는구나. 그리고 이상하게도 8살짜리 큰 오빠가 혼자 앓지 않아 밭에 나가 검불이라두 끌어다가 불을 때주면서 심부름하였단다. 아버지는 몹시 아프시면서도 큰 오빠가 앓을까봐 “내가 이병을 싹 걷어 가지고 가겠소. 여보, 내가 없어도 저 애들 공부를 잘 시켜 사람 만들어 주오.” 하시더란다. 며칠 뒤 끝내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어 엄마는 통곡 하셨단다. 청천벽력이었지……

 

“왜서 우리를 두고 먼저 간단 말이요? 이 애들을 내가 혼자 어떻게 키우란 말이요? 해방되면 고향에두 함께 가보자 약속두 해놓고… 내가 이국땅에서 혼자 어쩐단 말이요?”

 

하느님도 무정하여 엄마가 아무리 통곡하여도 아버지를 일어나게 못하시더란다. 그런데 엄마도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해서인지 엄마도 까무러쳤다는구나! 그런데 세상도 모르는 돌도 안 되는 내가 엄마의 젖가슴에 매달리고 언니 오빠들도 눈물범벅이 되어 엄마를 부르더란다. 차마 눈뜨고 볼 수없는 처참한 모습에 삼촌도 억이 막혀 형수만 불렀다는구나! 흐리멍덩하게 들려오는 애들 울음소리에 엄마는 다시 정신을 차리시더란다.

 

“내가 죽어선 안 되지, 저 불쌍한 것들을 어쩌고, 내가 죽는단 말인가?”

 

며칠 뒤 엄마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애들을 끌어안고 통곡하시곤 눈물을 씻으면서 “다시는 울지 않고 열심히 살아 애들을 잘 키우겠다.”고 하시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