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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이 펼친 구휼과 믿음의 정치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2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를 펴는 세종을 따라 지난 몇 회 세종의 생각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보았다. 그 주요 이념은 무엇일까. 큰 틀에서는 즉위교서에 나타난 첫 말씀 곧 ‘시인발정(施仁發政)’으로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일)

 

세종의 ‘시인발정(施仁發政)’

 

세종의 ‘시인발정(施仁發政)’은 맹자의 ‘발정시인’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세종은 맹자를 보았을 것이고 이를 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발정시인’은 BC 300년 무렵의 정치 체제 미완의 시대에 먼저 바른 정치를 앞세우는 일이고, 세종의 ‘시인발정’은 ‘사랑[仁]의 실천’으로서 힘을 갖는 일이다. 맹자의 ‘말’과 세종의 ‘일’[실천] 사이에는 시대적, 상황적 차원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보면 맹자와 세종은 별개의 것이 된다. 세종의 판단은 세종의 사유와 시정 철학의 결과라 할 것이다.

 

‘시인발정’의 구체적 사상은 다음과 같다. 가)하늘을 공경하고 : 경천(敬天) 나)백성을 사랑하며: 애민(愛民) 다)충성이 천자에 이르고: 충성(忠誠) 라)효하고 공경함이 신명에 통하여: 효제(孝悌) 마)예(禮)가 일어나고 악(樂)이 갖추어져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게 젖어들었고 바)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施仁發政] 나아가게 되리라.

 

이상에서 경천, 애민, 충, 효, 예, 악, 인(仁)의 철학이 언급되었다. 그간 상왕 태종이 이루어 놓은 것이기는 하더라도 그 법도를 따를 것이라 선언한다. 앞에 내세우는 것은 추상적이지만 그 실천에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많다.

 

어진 정치를 한다는 것은 먼저 구휼이나 의료 활동으로 굶주리지 않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일이 기본이 된다. 다음으로는 정신적으로 실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과 법의 공정성 그리고 나라에서 시행하는 일에 백성과 나누는 신(信, 믿음]의 관계다. 이것이 기본이 되어야 충성, 효도, 예절과 즐거운 음악도 뒤따르게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치의 기본은 사람 살리기로서의 구휼이다. 굶는 백성이 없게 해야 한다. ‘구휼(救恤)’이라는 말을 단순하게 견주면 《조선왕조실록》 원문 전체 243건 가운데 세종 57건이다. 세종은 역대 임금 가운데 구휼의 임금이다. 그 시대에 재해가 많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세종이 특히 구휼을 많이 폈는지는 또 다른 논의가 된다. 그리고 ‘구민(救民)’은 전체 465건 중 세종 42건이다. (기타 중종 48건 숙종 61, 영조 48건이다.) 단연히 많은 기사 건수다. ‘휼민(恤民)’은 원문 1,354건 가운데 세종 116건으로 단순 비교로 중종 - 영조 다음이다.

 

법의 집행에 따른 사면은 사랑을 베푸는 정치의 하나다. 사면이란 것은 덕의를 선포하고 더러움[하자, 瑕疵]를 씻어내어 새로움을 열어가는 길이다. (《세종실록》 4년 2월 5일) 법은 중하고 백성들은 무지하다. 많은 죄는 백성들이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하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과 기회를 열어주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죄 사함 : (교지를 내리기를), 죄를 사(赦)하는 것은, 이전의 허물을 씻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열게 하는 것인데, ... 비록 대사(大赦)를 지나도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은 백성에게 신의를 보이는 까닭이 아니다.(《세종실록》 7/11/9)

 

상호 믿음[信]이 정치의 근본

 

백성에게 바른 정치를 함에는 백성의 믿음이 따라야 한다. 나라에서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어떤 일이든 시행되지 않는다. 가령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일반적이던 당시 시장에서 화폐를 보급시키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신(信) :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위국지도 막여시신, 爲國之道 莫如示信) 처음에는 저화를 보물로 삼아 그것을 쓰게 하였다가, 이제 와서 오로지 돈만을 쓰게 하고 그것을 헛되이 버리게 된다면, 백성 가운데 저화(楮貨, 고려 말ㆍ조선 초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를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근심하고 한탄하지 아니하랴. 민간에 돈을 주고서 저화를 거둬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종실록》7/4/14)

 

백성이 저화를 쓰기 싫어하면 다시 동전을 쓰게 하는 백성이 원하는 바를 통해 믿음[信]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직(職) 정신을 바르게 실천하는 예이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전되고, 백성은 믿음에서 보전되는 까닭으로, 임금님의 정사(政事)는 반드시 믿음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세종실록》 9/1/26) 등에서 보듯 백성은 믿음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초기에는 화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화폐 정착에는 실패했다. 태종 때부터 포폐(면직류 화폐)와 저화에서 백성들은 기존에 써왔던 추포(베:면직류)의 사용을 여전히 더 좋아하고 있었다. 결국 저화의 사용은 저화 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져버려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의지만으로 되지 않고 생산과 유통 따위 산업구조가 성숙되어야 하는 과제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 과정에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쌓여 후대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세종의 인(仁)의 정치는 백성이 먼저고 실제적으로 구휼과 사면 그리고 정책에서 백성과의 사이에 사랑과 믿음을 보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20여회는 학습과 생각을 주제로 글을 써 왔고, 다음 회부터는 사맛[소통,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적어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