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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귀가 큰 판사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1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어떤 판사가 재판 잘 하는 판사일까요? 명쾌한 법논리를 통해 쾌도난마식으로 사건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판결하는 판사? 속전속결로 신속하게 재판하는 판사? 상급심에서 판결이 파기되지 않도록 요령있게 판결하는 판사? 물론 다 재판 잘 하는 판사에 들어가겠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꼽으라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판사가 재판 잘 하는 판사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일반국민들이 송사로 법정에 서는 일은 일생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사자들은 재판 결과도 중요하지만 법정에서 자기 얘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어하고, 또 판사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판사는 하루에 재판 한, 두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건을 들고 법정에 들어오기에 당사자들의 장황한 얘기를 다 들어주다간 다른 사건 재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개 당사자들의 얘기는 처음 얼마간 들으면 무슨 얘기하는지 다 파악할 수 있기에 조리 없이 중언부언하는 당사자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판사들이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사자의 얘기를 중간에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얘기를 중간에 끊을 때에도 재치 있게 잘 끊어야지, 안 그러면 ‘판사가 내 얘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며 당사자의 원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드러운 미소로 “피고가 얘기하려는 것이 ~~~한 것 아니냐? 더 자세한 것은 서면으로 써서 내면 잘 읽어보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제가 서울북부지원(현 북부지방법원)에서 민사단독을 할 때입니다. 그 때 동네 아줌마들이 원, 피고로 나뉘어 곗돈 갖고 싸웠습니다. 그렇게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변호사가 없으니 주장과 증거를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법정에서도 조리있게 얘기를 못합니다. 저로서도 원, 피고가 낸 서면과 증거서류만 갖고는 사건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다음 재판기일에 이 사건을 그날의 맨 마지막 재판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뒷 사건 생각할 필요 없이 원, 피고에게 마음 놓고 얘기하라고 하고, 저도 궁금한 것을 원, 피고에게 묻고 하여 하나 하나 쟁점과 증거를 정리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원, 피고를 법대(法臺) 앞까지 오라고 하여, 바로 눈앞에서 원, 피고가 제출한 서면과 증거서류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묻고 하며 사건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한 번에 정리가 안 되어 다음 재판기일에도 다시 이 사건을 그 날의 마지막 재판으로 돌려 다시 충분히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원, 피고에게 증인 신청 등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사이동으로 제가 재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부를 떠나고 얼마 후에 원고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재판기일에 법정에 나갔더니 법대에 앉아있는 판사가 내가 아니고 다른 판사라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자기 사건을 끝까지 담당하지 않고 중간에 떠나서 아쉽다면서도, 자기 얘기를 진지하게 충분히 들어주어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자기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만족한다고 하더군요.

 

그 원고 아줌마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전에도 당사자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이는 판사뿐만 아니라 변호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뢰인들은 자기 변호사가 자기 사건을 잘 처리해주는 것을 당연히 좋아하지만, 자기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것도 좋아합니다.

 

변호사들 또한 의뢰인들이 중언부언 하는 얘기를 계속 들어주면서, 속으로 “이 시간에 다른 서면 하나 더 쓰는 것이 유용한데, 이 얘기 계속 들어주어야 하나?”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들어주어야겠지요. 그러면 어떤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여 이제 속이 후련하다며 만족해합니다.

 

하여튼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 이게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려운 일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남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면 그만큼 남을 더 이해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남과의 분쟁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청(傾聽)! 우리 모두 경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