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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가 여성을 위해 쓴 한글 자료

국립한글박물관, 개관 5주년 기획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德溫, 1922~1844)과 그 후손들이 남긴 한글 유산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기획 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덕온공주의 친필 《ᄌᆞ경뎐긔》 외에도 눈여겨 볼만한 자료가 많다. 특히 덕온공주의 양자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던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한글로 쓴 중국 역사와 윤용구 유품 등은 첫 공개되는 자료일 뿐 아니라, 여성과 소통하고자 했던 윤용구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 국어학뿐 아니라 서예학, 역사학,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하다.

 

새롭게 조명해야 할 조선 말~근대기 사대부 윤용구

 

덕온공주와 윤의선(尹宜善, 1823-1887)의 양자 윤용구는 1871년 19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요직을 두루 거쳐, 3조(예조, 공조, 이조) 판서까지 지냈으며, 왕실의 종친으로 어린 시절부터 궁중에 드나들며 고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을미사변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숨어 지냈으며 한일병합조약 뒤 일본 정부에서 수여하는 작위를 거절했다.

 

윤용구는 궁중의 여러 의례에서 사자관(寫字官)으로 활동하고 다양한 서화작품을 남긴 서화가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왕실의 측근이었던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서화작품에 대한 연구도 부족한 편이다. 특히 그가 한글로 중국 통사(通史)와 여성의 역사를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소개되는 윤용구의 한글 자료들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은 윤용구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딸을 위해 한글로 직접 쓴 본받을 만한 여성들의 행적: 《여사초략(女史抄略)》

 

 

 

이번 전시에서는 덕온공주와 아들 윤용구,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의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을 각각 꾸몄는데, 윤용구 전시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딸을 위해 써준 《여사초략》이다. 중국의 역사에 나오는 30명의 본받을 만한 여성의 행적을 앞뒤로 각각 15명씩 먼저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 직접 번역한 것으로, 병풍처럼 절첩(折帖) 형태로 되어 있으며 펼쳤을 때 총 길이가 5.4m 가까이 된다. 책 표지에 윤용구가 1899년 12살의 딸 윤백영에게 직접 써 준 글이라고 기록했고 후에 윤백영도 한글로 이 사실을 적었다.

 

여사(女史)는 궁중에서 비빈(妃嬪)들을 모시고 궁중의 일을 기록하던 여관(女官), 초략(抄略)은 간략하게 요약한다는 뜻이지만, 수록 내용으로 볼 때 《여사초략》은 간추린 여성의 역사 정도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아버지가 딸에게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써준 예가 있지만 이처럼 딸을 위해 중국 역사에 나오는 본받을 만한 여성을 직접 골라 그 행적을 한글로 정성스럽게 쓴 예는 거의 유일하다.

 

남성이 쓴 보기 드문 한글 궁체(宮體)라는 점도 특별하지만, 그 내용은 더욱 특별하다. 조선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에 수록된 여성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여성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여사초략》에 수록된 여성들은 아들이나 남편의 정치적 조언자, 현명한 처신과 기지로 남성들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 중심이다.

 

사대부가 한글로 직접 편찬한 유일한 중국 통사 : 《정사기람(正史紀覽)》

 

 

《정사기람》은 태고(太古)부터 명(明)나라 말까지 중국 역사를 시간 순서인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것이다. 《정사기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80권 80책 완질본이 남아 있는데, 이번 전시에 소개된 것은 이와 다른 이본(異本)이다. 《정사기람》의 서문에는 궁녀들이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된 중국 역사책을 펴내라는 고종의 명에 따라 윤용구가 1909년 완성하여 고종에게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간 《정사기람》의 내용은 상세하게 고찰되지 않고, 막연히 중국의 《정사기람》을 한글로 번역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번 전시 준비를 하면서 《정사기람》은 윤용구가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섭렵하여 직접 한글로 쓴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중국 여러 역사서를 두루 보고 중국 역사 전체를 직접 편찬한 사례는 매우 드물며, 더욱이 한글로 쓴 예는 없어 윤용구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와 학식을 가늠하게 한다. 특히 한글박물관 소장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에는 없는 한문이 병기되어 있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국에도 없는 중국 여성 열전: 《동사기람(彤史紀覽)》

 

 

《동사기람》은 태고(太古)부터 명나라 말까지 중국 여성들의 전기를 모은 일종의 여인 열전이다. 동사(彤史)는 여관(女官)의 다른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사기람》은 《정사기람》과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데, 《정사기람》과 달리 서문이 없다. 그간 일부 논문에서 《동사기람》을 소개한 예는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검토된 바가 없으며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사기람》과 마찬가지로 윤용구가 다양한 중국 자료에서 관련 내용을 뽑아 직접 편찬했으며, 한글로 쓰고 한문 번역을 붙였다.

 

《동사기람》은 조선 시대에 통용되던 여성 관련 자료 또는 여성 교화서와 체제와 내용이 다르다. 특히 왕비나 귀족뿐 아니라 다양한 신분의 여성,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이른바 악녀(惡女)도 등장하며, 여성과 관련된 제도나 풍습들도 함께 서술했다. 중국에도 이처럼 전 시대에 걸쳐 수백 명의 여성 전기를 망라하여 편찬한 자료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어 상세히 고찰해야 할 자료이다.

 

윤용구의 다양한 서화작품과 유품들

 

이번 전시에는 윤용구의 다양한 서화작품과 벼루, 붓 등 윤용구 집안에서 사용했던 문방구, 윤용구가 입었던 관복도 함께 선보인다. 윤용구는 글씨를 잘 써 궁중의 의례에 여러 차례 사자관으로 활동했으며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다. 전시에 소개된 윤용구의 대나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근대서화전>에 전시된 대나무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순원왕후(純元王侯, 1789-1857)가 딸 덕온공주에게 준 《고문진보언해(古文眞寶諺解)》 17권 가운데 불에 타서 사라진 부분을 윤용구가 보충한 책 실물도 이번에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직접 만나지 못한 어머니 덕온공주를 향한 윤용구의 효심과 공경의 마음이 이 책에 담겨 있어 인상 깊다.

 

후손 유선이 전언한 윤용구가 한글로 책을 집필한 이유

 

 

 

윤용구의 딸 윤백영의 유일한 손녀이자 윤백영과 함께 생활했던 유선(1939년생, 미국 거주)이 윤백영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윤용구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명에 따라 왕실의 사대부와 여인들이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역사서를 썼다고 한다. 또한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 한글로 모든 백성이 책을 편안히 읽을 수 있도록 중국 5천년 역사 서적들을 한글로 편찬했으며, 일제가 우리 국민들이 한글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정책을 편 것에 반대하며 국민들을 위해 주로 한글로 책을 펴냈다고 한다.

 

국립한글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윤용구의 한글 자료들은 남성이 쓴 드문 한글 궁체(宮體)로, 19~20세기 초 국어의 특징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사, 중국사, 미술사, 여성사, 서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이다. 또한 윤용구가 직접 한글과 한문을 함께 쓴 자료라는 점에서 한문 번역 분야에서도 참고할 요소가 많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동시대 남성들에 비해 여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윤용구와 그의 자료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