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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초조팔만대장경이 있었던 팔공산 부인사(符仁寺)

석탑,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해 아쉬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생노병사의 길은 숨쉬며 살고 있는 생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좁게는 생명체 그 중에서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생노병사를 말 하지만, 넓게는 모든 생명체를 포함할 뿐 아니라 일백수십억년을 이어온 태양계와, 더 나아가서는 우주 자체도 한 생명체가 생노병사하듯 우주 또한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는 것이 현대천문학이 밝혀낸 우주 순환원리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우주에 견주면 너무도 사소한 일들일 뿐인 인간세상에 있어서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흔적들이 쌓여서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속에는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던 자랑스러운 것들도 많은 반면 역사의 주인공에서 하염없이 추락하여 쇠락한 역사도 무수히 있었다.

 

오늘 찾은 부인사(寺)는 1,000여년 전 한때는 매우 융성했던 절이나, 지금은 그 창건 연대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절로 불교 성지중에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문화의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장(經藏), 부처님의 가르침 중 수행자가 지켜야할 계율을 기록한 율장(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풀어서 쓴 논장(論)을 모두 모아 대장경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대장경을 나무판에 새겨서 가지고 있는 나라가 문화의 선진국 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정착하여 화려하게 꽃이 피어나자, 그 화려한 부처님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방대한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 첫 나라는 송나라였다. 그러자 고려는 이에 뒤지지 않기 위해, 송나라 팔만대장경에서 빠진 부분들을 모아서 더욱 완성된 대장경 판각작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대장경을 만든 것이다. 그때 대장경을 만든 계기는 부처님을 받들어서, 이 땅에 불국토를 만들고 그 원력으로 부처님의 보호아래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대장경을 만드는 작업은 매우 방대한 사업이다. 그냥 만들고 싶으면 아무때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대장경을 만든다는 것은 먼저 대장경에 새길 '경, 률, 논 삼장'을 빠짐없이 모아야 했고, 모은 '경-률-논'이 정말로 틀림이 없이 제대로 된 것인지 수많은 스님들 학자들이 검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절차가 마무리된 뒤에는 대장경을 새길 나무들을 채집하고, 채집한 나무들을 판각하기 적당한 크기로 만들고, 좀슬지 않도록 훈증처리도 해야한다. 

 

한편에서는 대장경에 새길 경전들을 오탈자가 없이 완성하여, 이를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한자 한자 붓으로 쓴 뒤, 이를 판각할 나무에 붙여서 판각수들이 한획 한글자도 잘못됨이 없이 새긴 뒤, 이를 다시 검증받아서 만들어야 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명필도 자기 나름대로 글자의 멋이 있지만, 그런 자신만의 글자체를 버리고, 오로지 누가 쓰던 오직 한사람이 다 쓴 것과 같은 필체로 팔만장의 경판에 새길 경전을 써야 했다.

 

우리가 현대문명속에서 살면서 불과 한장짜리 글을 쓴다 해도, 글을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오타가 나서 고치는 경우가 몇 번씩 있는데, 경판의 수로 팔만장의 대장경판에 그렇게 많은 글자를 쓰는 동안 오자가 없이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국력을 다 쏫아부은 거국적인 사업이라 하더라도, 방대하고 초인적이며 불가사의한 힘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이룩하기 어려운 일 이었을 것이다.

 

그런 초 고난도의 작업을 거쳐서 고려시대 문화국임을 자처할 수있는 초조팔만대장경은 만들어졌다. 초조팔만대장경이란 고려시대 두번의 팔만대장경 판각이 있었는데 그중 처음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란 뜻이다. 우리가 지금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초조팔만대장경이 몽골 침략으로 없어진 후 다시 만든 것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하여 재조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초조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당시 서울인 개경(지금 개성) 근처에 있는 흥국사, 귀법사 등 여러 절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송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온 대각국사 의천이 대장경을 만들기 위한 정부기구를 만들고, 경전 율장 논장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제작된 초조 팔만대장경은 개경근처에 있던 흥왕사에 한동안 모셔졌다가, 이곳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져 보관하게 되었다. 초조대장경을 이곳 먼 남쪽 팔공산까지 옮긴 이유는 당시 북방 거란족의 침략으로 개경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무적의 거란군을 물리친 것을 팔만대장경을 모신 부처님의 힘이라고 믿었던 고려는, 이후 몽골족의 침략시에도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족의 침략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천하무적 몰골군에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다. 그런데 몽골은 고려의 항몽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하여 부처님 힘의 원천이던 팔만대장경을 없애버리기로 마음먹고 멀리 팔공산까지 내려가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팔만대장경판을 불태워 버렸다.

 

1232년 그렇게 허무하게 불타버린 초조팔만대장경 출판본은 현재 부분적으로나마 여러곳에 나뉘어 살아남았다. 초조팔만대장경은 지금 한국 일본의 박물관 등에 나뉘어 보관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 2,000여 권이 일본 교토 남선사(南禪寺)와 대마도의 절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

 

고려시대 초조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부인사는 그 찬란했던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그 창건연대와 창건자를 알수없다. 다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부인사는 초조 팔만대장경을 보관했을 때는 약 2,0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하던 절이었다. 당시에는 부인사의 부속으로 39개 암자들이 있었고, 전국의 승시장(僧市場)이 열려 스님들이 쓰는 물건들을 사고 파는 장이 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불탄 뒤 다시 그 터에 중창이 이루어졌지만 또 다시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더 이상 오랜 역사의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고 있다. 찬란한 역사가 세월의 풍파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부인사는 본래 부인사 자리에서 약 400m 떨어진 암자터에 1930년대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스님이 중창한 것이다. 당대의 것들을 땅속에서 거두고 그중 석탑과 승탑 그리고 석등의 일부만을 현재의 부인사터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부인사에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동서삼층석탑, 석등, 당간지주, 석등대석, 배례석, 마애여래좌상 등이 있다.  오랜 역사와 찬란했던 문화이지만, 성주괴공(成住壞空: 생겨나고, 머무르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자연의 이치를 이르는 말)의 세월속에 다시금 세운 부인사의 전각을 보면서, 잠시나마 옛 영화를 상상해 본다.

 

옛 영화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복원해보고자 절 주변은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앞으로도 몇년간 복원공사가 완성된 뒤의 모습은 보기 좋은 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본래 부인사터에서 발굴하여 옮겨온 유물들이 절의 기본 배치에 어긋나는 자리에 세워지고 있어, 무척 아쉬웠다. 예를 들면 사찰의 석탑은 중심건물인 대웅전의 앞에 세워져야 할텐데, 누각문 앞에 세워지고, 석등 또한 마찬가지다. 절의 배치는 그 배치원리에 따라서 크기도 정하고 그 위치도 정해야 마땅하다. 그런 원리를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하지 않은 것인지 아쉽고 궁금하다.

 

부인사 경내는 공사중인 건물들 주변으로는 비구니스님들이 정성으로 가꾸어놓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부인사의 오늘 모습은 성주괴공의 한바퀴 윤회를 하고, 또 다시 성주괴공의 성(생겨나고 이루어짐)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성-주-괴-공의 역사를 또 다시 겪게 되겠지만 그 또한 하나의 생명체가 생겨나고 제대로 성장하고 세월따라 늙고 다시 언젠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윤회의 한면을 생각하며 오늘 부인사탐방을 마친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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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