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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의 지혜와 지식이 펼쳐진 집현전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27 (사맛의 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소통] 정신은 듣기로부터 시작해 집단 지성으로 이어간다

 

세종의 사맛[소통] 정신은 듣기로부터 시작해 묻고, 조사하고, 논쟁하며 현장을 찾아 확인한다. 이렇듯 기본적인 문제점이 정리되면 대안을 찾는데 그 정신은 ‘실제로 유용한가?’하는 근원캐기의 실용정신에 근거한다. 이에 대한 실천 연구기관으로는 상정소(詳定所)와 집현전(集賢殿)이 있다.

 

상정소는 행정과 정치적인 이슈에 대하여는 각 조(曺) 대표들이 모인 팀 회의에서 토의, 결정하도록 했다. 특별전문위원회(task force 팀)을 운영한 것이다. 집현전은 천문, 의학, 농사, 언어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를 하도록 했다. 한 팀이 종적이라면 연구팀은 횡적인 셈이다.

 

▪ 상정소 운영

 

상정소는 《조선실록》에 원문 352건으로 태종 11건, 세종 240건, 세조 59건이다. 세종은 조선시대 상정소의 집단 특별전문위원회 팀을 운영하며 여러 법과 규정을 만들어, 조선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상정소는 나라의 법규ㆍ법전을 제정하거나 정책 및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다. 상정소에는 육전상정소(六典)ㆍ예조상정소(禮曹)ㆍ공안상정소(貢案)ㆍ전제상정소(田制)ㆍ의례상정소(儀禮) 등이 있었고, 일거리에 따라 여러 종류의 상정소가 설치되어 전문 학자와 관료가 상정관(詳定官)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경제육전(經濟六典)ㆍ속육전(續六典)을 정비, 통합하여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세종실록》의 상정소 기사

 

     

 

세종 때 상정소 기사 240건을 분류해 보면 이조 53건, 호조 47건, 예조 138건, 병조 6건, 형조 21건, 공조 5건 등이다.(이 분류는 두 부서에 걸친 일이 있기도 하여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한 예로 예조에서 생원시 숫자를 정하면 이는 이조의 인사문제이기도 하다)

 

상정소는 가) 급한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다. 세종 18년 윤 6월 15일 공법 상정소를 두고, 다시 세종 25년 전제상정소를 설치한 이후 10여 차례 전제상정소 관련기사가 보인다. “ 전제(田制)상정소를 설치하고, 진양대군 이유(李瑈)로 도제조를 삼고, 의정부 좌찬성 하연ㆍ호조 판서 박종우ㆍ지중추원사 정인지를 제조로 삼았다.”(《세종실록》25/11/13)

 

나) 의례에 관한 사안을 많이 다루었다. 태종 8건 세종 22건으로 조선 초기에 의례제도 정비에 상정소 활동이 활발했다. 제의(祭儀), 봉사(奉祀), 국상(國喪), 의식(儀式), 예장(禮葬), 제향, 의주(儀註), 축문, 부의(賻儀), 의궤, 복제, 관복 제향음악 등이다. 다) 부처간 통합 토의가 필요한 문제를 상정소에서 처리한다. 장기간 연구인 경우는 집현전이 맡기도 한다.

 

▪집현전

 

 

집현전은 세종 조에 456건으로 그 활동은 광범위하다. 정종 때 집현전이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것마저 곧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건국 이래 유교 주의적 의례ㆍ제도의 확립이 필요했고 대명 외교도 과제였다.

 

이런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 인재의 양성과 문풍(文風, 글을 숭상하는 풍습)의 진작을 위해 세종 2년 집현전을 설치하게 되었다. 집현전의 전임관, 곧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에는 10인이었다. 그러다가 세종 4년(1422년)에는 15인, 1426년에는 16인, 1435년초에는 22인, 그 해 7월에는 32인으로 점차 늘었으나, 세종 18년에 20인으로 축소되어 고정되었다. 자격은 선비로 재행(才行, 재주와 착한 행실)이 있는 나리가 적은 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집현전은 1392년(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경연과 책을 보관하는 일을 하던 관청)ㆍ수문전(修文殿,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곳)ㆍ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세종 2년, 1420). 이후 세조(世祖) 2년(1456)까지 지속되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이후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한 해에 궐내에 규장각을 창설할 것을 명한다.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에서 출발했지만, 정조는 이곳을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였다.)

 

지혜와 지식

 

제도 운영과 연관하여 보면 세종은 지식을 추구하며 각자의 지혜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지식과 지혜, 지식과 경험의 관계를 유학의 이야기로 정리해 보자.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공자왈: "생이지지자상야, 학이지지자차야, 곤이학지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안다는 것에는 ‘생이지지’로 태어나며 아는 것이 있고, ‘학이지지’로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이 있고, ‘곤이학지’로 고생이나 고통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경험적 지식이 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혜는 본성적인 것이지만 지식은 정보를 쌓아 얻는 일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혜[wisdom]가 없으면 지식을 활용할 수 없다. 한 가지 예로는 지혜는 다름을 인정하며 융통성을 가지고 지식을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지혜는 슬기로움이다.

 

정보는 낱자료(datum)에서 자료들(data)로 모이고 다시 정보(information)가 되고 꾸러미정보(package information) 그리고 정보를 체계화한 지식(knowledge)이 되며 나아가 지식에 기술(technic)이 합쳐져 기술력(technolgy)이 된다.

 

유학에서 말하는 지혜는 자기 몸과 의식 속에 있는 본성을 닦는 일이다. 본성 혹은 초심을 되찾는 일이다. 초심은 일을 앞두고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사물에 임해 기술을 갖고 일에 임하면 창의력을 발휘하게 된다. 뇌의 훈련을 통해 뇌에도 일반 근육에서처럼 뇌근육이 생겨나게 하는 한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오늘날에는 몸노동보다 생각 노동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는 선비 곧 각 분야 전문가를 길러낸, 뒤에서 도와준 세종의 정치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는 정치를 수행한 세종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되새겨보아야 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