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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들이

[화보] 국난 앞에 당당했던 김포 덕포진(德浦津) 포대유적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김포에 있는 덕포진은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향하여 강화로 넘어가기 직전 오른쪽 대명항 방향으로 길을 바꾸어 올라가면 만나는 김포의 서쪽에  있는 작은 나루터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터는 없고 조선후기 개항기에 최신 대포로 무장한 적(프랑스, 미국)의 군함과 맞서 싸우던 격전지로 포대들이 있던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후 조선의 국운이 단절이후 오랫 동안 방치되어왔고, 군사시설들이 오랫동안 묻혀있던 것을 최근  발굴하여 다시 옛모습으로 복원한 한양 방어를 위한 최전방 국방유적이다.

 

덕포진에 본토 해안방어를 위하여 군사시설이 설치된 때는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략에 죽을 고비를 넘긴 조선조 선조 때로 추정되는데, 그 때는 이곳이 김포가 아닌 강화의 관할구역으로 수군의 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후, 왜군이 다시 처들어 온다면 반드시 서해를 돌아서,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올 경우 꼭 지나야할 곳이 강화해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해협의 덕포진은 1682년 숙종 8년에 강화부의 주진영으로 승격되어 영종도와 인천 앞바다 그리고 멀리 안흥진을 관장하는 큰부대의 였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침략할지 모르는 일본 때문에 덕포진이 세워졌지만, 실제 격전은 프랑스군(병인양요; 1866년)과 미군(신미양요: 1871년)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강화해협의 언덕으로, 바위로 된 돌출언덕에는 김포나 강화나 방어용 진지들이 여러 곳 구축되었다. 그 중에 육지인 김포에 있는 것이 덕포진이다. 이곳은 조선말 군함을 동원한 위협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려 할 때 프랑스군의 병인양요와 미군의 신미양요가 일어났는데, 그 때 적의 거대한 군함과 최신 대포에 맞서, 조선수군은 구식 대포를 쏘며 죽음으로 맞서 항전을 하였고, 수많은 조선수군들이 추풍낙엽처럼 죽어갔던 비극적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고, 수많은 다윗들은 죽어가면서도 비굴하지 않아, 그 결사항전하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군과 미군이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김포 덕포진 개항기 격전의 자취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돌볼 겨를이 없어 모두 사라지고 땅속에 묻혀있다가, 1980년에 이르러 하나씩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포대 3곳, 돈대터 1곳, 파수청터 등이 발굴되었다. 포대에서는 1874년 고종 11년 제조한 중포 4문과 소포 2문 그리고 포탄등이 발굴되었다. 이때 파수청은 지휘소이자 포를 쏘기 위한 불씨를 보관하던 곳으로, 파수청 건물터에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굴되었고, 당시 쓰던 엽전인 상평통보도 발굴되었다.

 

그런데 덕포진이 선조 때 군사기지로 만들어지기 전, 이곳은 고려시대 몽골의 참략당시 고려 고종을 강화도로 건네주다가 죽은 어부 '손돌'의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때는 1232년 고려 고종 19년이었다.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 지금은 '손돌목돈대'터가 있고, 그 위에는 '손돌의 묘'가 있어 옛날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세계를 휩쓸던 몽골이 고려로 침략해오자 고종은 개경을 떠나 '손돌'의 어선을 빌려타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김포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좁고 급류가 흐르는 곳이라 배가 자주 뒤집어지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이곳에 이르면 회오리치는 바닷물에 앞이은 막힌듯 하여, 처음 가는 사람은 누구나 뱃길이 없는 곳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이다. 손돌의 배에 올라 강화도로 향하던 중, 앞으로 뱃길도 보이지 않자 고종은 손돌이 자신을 죽게 만들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수차례에 걸쳐 뱃길을 바로 잡도록 소리쳤다. 그러나 손돌은  그때마다. "보기에는 막힌듯 하지만 좀 더 나아가면 길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안심 하시옵소서."하며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고종은 마음이 더 초조한 나머지 끝내 '손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여 급기야 '손돌'을 당장 참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손돌'은 고종을 강화도에 내려주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참수되기 직전 거센 물살이 굽이치는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고 '이 바가지를 따라서 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니 그리 하시라.'는 말은 남기고 참수되었다. 손돌이 죽은 뒤 임금 일행은 손돌이 띄워놓은 바가지를 따라서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강화도에 이르렀다. 고종은 그제서야 자신의 성급함 탓에 충성스러운 어부 '손돌'을 죽인 잘못을 깨닫고, 손돌을 후하게 장례지내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까지 세워주었다.

 

손돌의 주검은 이미 바닷속으로 던져진터라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장례식이었고, 따라서 무덤도 쓰지 못하였다. 이후 이 뱃길목은 손돌이 참수된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고 해안가 언덕에는 조선조에 이르러 '손돌목돈대'도 세웠다. 지금도 그가 죽은 음력 10월 20일이면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몰려오는데, 이를 사람들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하여 이를 '손돌풍'이라고 부르며, 이때의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른다.

 

지금 '손돌'의 무덤자리에는 본래 고려 고종이 세운 손돌의 사당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그 사당이 헐렸고 살기 어려운 시절 나라도 없어진 뒤에는 주민들의 제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는 손돌의 충정심 또한 살필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다시 광복을 맞이하고 또 한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 대 이지역 주민들은 옛날 있던 손돌의 사당을 대신할 수 있도록 손돌목 바위 위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지금은 해마다 10월 20일 김포시 주관으로 충성스럽게 임금을 인도해준 공을 기려 '손돌제'가 거행된다.

 

니리가 위급할 때마다 백성들은 맡은 바 충성을 다해왔고, 천한 신분을 탓하지 않고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쳐가면서 충성을 다했으며, 외적과 싸워서 국난을 극복한 결과 오늘 우리가 있다. 임금앞에서 목이 잘리면서도 제 할일을 다한 뱃사공 '손돌'이나,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부실한 구식대포로 항전하며 죽어가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던 수많은 장군 이하 수군들의 역할을 되새기며, 강화해협 요충지, 김포 덕포진요새와 원혼이 되었을지 모르는 손돌의 자취를 돌아본다. 앞으로는 최첨단 병장기들의 등장으로 이런 돈대에서 적과 맞서싸울 일은 없겠지만, 후세를 위한 역사교육장으로는 반드시 가보아야할 국방유적이라 생각된다.

 

기자정보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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