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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훈민정음 해례본' 지켜낸 독립운동가 전형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13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탁자 위엔 비취빛 하늘에 69 마리의 학이 오르내리는 청자 매병 한 점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매병의 주인은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라는 배짱으로 “2만 원!”하고 불렀지요. 그때의 돈 값어치로 보면 기와집 20채(한채 1,000원), 쌀 1,250가마(쌀 한 가마니 16원)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청년은 선뜻 이에 응했지요. 고려청자 으뜸 명품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넘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넘보지 못할 값어치의 유물이 있다면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안동의 소장자가 천원을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 책값 1만원에 거간꾼의 수고비로 1천원을 더 얹어 입수한 뒤 선생은 조선총독부가 알까봐 극도의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것은 다 두고 피난을 가면서도 이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는 정성으로 지켜냈습니다. 그 바람에 이 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29년 간송 전형필 선생은 토지 10만석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던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밀반출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선생은 이를 막기 위해 전 재산을 바쳐 지켜냈지요. 그 때문에 선생은 말년에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졌어도 지켜낸 문화재를 내다 팔지 않았습니다. 1906년 오늘은 간송 선생이 태어난 날로 선생이 수집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민족정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