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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영화' 봉오동전투'의 정신력, 다시 부활하는가!

무명의 독립군들, 일본을 향해 '우리는 위대한 겨레' 외친다

[우리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한국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때에 영화 <봉오동전투>가 개봉되었다. 그래서인지 개봉 2일째인 어제 누적 관객 수 352,594명(다음영화제공)에 이른다. 일본의 경제침략이 일어날 줄을 아무도 몰랐을 때부터 영화가 만들어졌으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경제침략과 <봉오동전투>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 그러나 99년 전인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봉오동전투’는 새로운 ‘경제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을 향해 우리는 이렇게 절대 열세 속에서도 승리하는 겨레임을 오치고 있는 것이다.

 

봉오동전투는 병력의 수나 무기 등에서 절대 열세였던 독립군이 봉오동이라는 지형을 이용하여 전력과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대승한 전투다. 영화의 전개 역시 정규부대인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의 흐름으로 일관된다.

 

 

 

 

주인공 황해철(유해진)과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 그리고 황해철의 오른팔인 마병구(조우진) 3인방이 주축으로 열세한 독립군이지만 지략으로써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전술이 흥미진진 전개된다. 적군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크고 작은 전투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러한 가운데 독립자금의 운반은 더욱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봉오동전투>는 한국의 독립군과 일제국주의 군대와의 한판 싸움이다. 영화에서도 여러 번 대사가 나왔듯이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처럼 국가가 모든 것을 지원하는 정규군이 아니다. 마적, 도적, 농사꾼 등 그 출신이 다양할뿐더러 제대로 된 무기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정규 일본군보다 뛰어난 것은 ‘정신력’이다. 빼앗긴 나라를 일제로부터 구하려는 강한 정신력이야말로 그 어떤 무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한 정신력의 산물이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구심점이었다. 실전에서는 최첨단의 무기를 지닌 쪽이 유리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봉오동전투>를 보면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양으로 진을 쳐(학익진, 鶴翼陣) 일본 수군을 물리친 통쾌한 장면이 떠올랐다. ‘봉오동’이라는 협곡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일망타진한 전술이야말로 독립군의 뛰어난 지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배우 유해진이 대도(大刀)를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 들어가 일본군을 처치하는 장면은 영화이긴 하지만 99년 전 봉오동전투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 영화를 만든 원신연 감독은 <독립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4명만 희생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 <봉오동전투>는 사실(팩트)에 근접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봉오동전투>에는 일본 배우가 여럿 등장한다. 일본군 장교로 나오는 기타무라 가즈키, 이케우치 히로유키와 독립군의 포로가 된 어린 일본군 유키오 역으로 나온 다이코 고타로 씨의 출연 용기에 손뼉을 보낸다. 어차피 이 영화는 ‘봉오동전투’라는 한국쪽 승리의 전투이기에 일본쪽에서 이를 소재로 영화화 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쪽 승리의 영화에 일본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악랄한 악역이 아닌가!

 

봉오동전투는 일제침략기 만주 봉오동에서 일어난 전투다. 1920년 6월, 병사력도 무기도 자금력도 없는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의 자신감이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국난의 시기를 이겨낸 ‘정신력’이 돋보이는 영화 <봉오동전투>가 ‘봉오동전투 99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되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그 의미는 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