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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이순신장군 순국유적지 남해 관음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남쪽해안은 푸른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섬이 많아 다도해라 이름을 얻은 남해는 동쪽으로 부산포에서 시작하여  거제도, 남해도, 여수반도, 진도, 완도, 신안을 거처 목포에 이르기 까지 펼쳐진 섬들이 자그만치 3,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가득하다. 그 많은 섬들에는 특히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섬들이 여러개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섬들로는 몽골의 무적기마병에 끝까지 항쟁했던 보배섬 진도가 있고, 임진왜란 7년 동안 충무공을 비롯한 조선의 수군들이 목숨바쳐 싸웠던 남해도, 진도와 거제도가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최후까지 싸우다 마지막 생을 마감한 남해의 관음포 전몰 유적지를 찾았다.

 

관음포 해전은 1598년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새벽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왜군은 관음포의 맞은편 순천왜성을 근거로 버티다가 광양만에 300척의 함선을 정박하고, 명군과 협상한 후 종전을 선언하고 조선에서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을 비롯한 조선해군은 조선 전국토를 초토화 하고, 수백만명의 백성들을 살상하고, 또 수십만명은 포로로 끌고갔으며,  수천년 일구어온 선조들의 피땀어린 건축물과 문화재들을 불태우고 그중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일본으로 빼돌린 철천지 원수같은 일본군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한같은 것은 없고, 오로지 전쟁이 끝나 하루라도 빨리 자기나라로 되돌아 가고픈 명나라 수군들은 일본군과 싸워서 단 한명이라도 전사자를 내기도 싫었기에, 일본군과 내통하고 일본군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내주었다. 당시 명군 제독은 한때 이순신 장군과 다툼이 컷던 '진린'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한사람의 왜군도 무사히 되돌아가는 것을 눈뜨고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이곳 관음포에서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되었다.

 

노량해전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조명연합함대가 묘도를 출발하여 명나라 수군은 노량수로쪽으로 가고, 조선수군은 관음포로 향하였다. 관음포에 이른 이순신 장군은 하늘에 마지막 전투의 승전을 위하여 기도 하였다. "하늘이시여 만약 이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신은 오늘 죽어도 아무런 근심이 없겠나이다."

 

이후 조명연합함대 400여척과 일본군 300여척이 전투를 시작하였다. 전투중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순신 장군은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게 되었고, 마지막 유언을 남고기 순국하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였다. 이 노량해전의 전투를 끝으로 일본함선은 전체 300여척중 200여척은 불타서 침몰하고, 나머지 50여척는 도주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전투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듯 하다. 전투에 임하는 장군이 몸을 감싼 갑옷도 벗고 지휘에 임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바겠다는 각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서 전쟁을 끝낸다면, 또 다시 조선 조정에서 자신이 정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음을 염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사정도 모르는, 싸우면 승리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는 무조건 전투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종합 판단한 이순신장군은 선조의 전투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잡아올려 온갖 고문을 자행했던 전력이 있었고, 전쟁중에도 당시 당파인 동인과 서인은 끝없이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는 것으로 조국과 백성에 해야할 일을 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관음포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전투 중 순국한 충무공의 흔적은 전쟁이 끝이 나고 234년이 지난 1832년 순조 32년에야 그 공이 인정되어, 당시 홍문관 대재학이었던 홍석주가 글을 써 충무공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의 이름은 '이충무공유허비'다. 이후 비석하나만 있던 이곳에 1950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남해군민 7,000여명이 성금을 거두어 이곳에 도로를 냈고, 1965년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충무공의 사당인 '이락사'를 지었다.

 

폭염이 한칭인 8월 중순 아름다운 남해도의 이곳 저곳을 다니며 풍광을 보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최후 전적지를 찾고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300년 뒤 당한 일제강점기를 당하고야 말았던 근세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내나라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8월 22일 일본과의 군사정보교류협정(GSOMIA)을 파기하자, 정치권은 그런 결정이 옳으니 그르니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오늘까지 일본과의 역사적 사실로 보았을 때, 일본과 군사정보를 서로 주고 받아서 좋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 요즈음  한국과는 우방이기를 거부하는 일본에, 우리 또한 일본은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할 이웃일 뿐, 마음을 줄 수 있는 우방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오직 기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어디 변함없는 영원한 우방이 있을까만은  정신차리지 않으면 주변국은 언제든 적으로 변하여 침략을 감행할 나라들로 둘려싸인 한국의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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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