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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무이구곡 깊은 곳을 찾는 까닭

주자와 퇴계 시의 다른 점
[솔바람과 송순주 1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북쪽의 이민족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의해 송(宋)나라가 망하고 남은 세력이 다시 지금의 항주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송나라(역사에서는 남송이라고 부름)를 세운 무렵에 태어난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나라가 이처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됐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그것이 불교와 도교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진(魏晋)남북조와 수(隋),당(唐)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은 침체되고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학을 압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며, 도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인의까지도 망가지므로 해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불교와 노자의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24살 이후 유학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유학에 복귀한 주희는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와 정호ㆍ정이 형제 등의 학문을 이어받아 새로운 유학을 연다.

 

그 유학은 과거처럼 경전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며, 경전과 성현의 말씀을 다시 새겨 우주의 원리를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 자신의 수양의 기본원리로 삼아, 보다 완전한 인간을 완성하게 한 뒤, 이들이 국가를 다스림으로서 천하를 안정되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불교의 참선법을 발전적으로 극복해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했고, 몸과 마음이 참된 길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평생 성찰하는 모범을 보인다.

 

주희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47살 때부터 60살 때까지로서, 이때에 그는 그동안의 학문연구를 바탕으로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을 잇달아 써내면서 전통적으로 중요시하던 오경(五經) 대신에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이른바 사서(四書)의 새로운 해석을 완성하고 있다.

 

 

 

이 시기에 주희가 살던 곳이 복건성에 있는 중국남동부 으뜸 명산인 무이산(武夷山)이다. 무이산은 예로부터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석, 2개의 병풍절벽, 8개의 고개, 3개의 바위암봉이 있고, 계곡도 많아 4개의 계곡, 9개의 여울, 5개의 웅덩이, 11개의 골짜기, 13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주희는 이처럼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명산의 한 가운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라는 일종의 사학 겸 연구소를 세우고 거기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친다. 5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자신이 개척한 학문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이 무이산 계곡의 굽이굽이 아름다움을 빗대어 자신의 학문적인 성취를 자랑하는 시,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지었다. 이 시들은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묘사해, 흔히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라고도 부른다.

 

"동주에서 공자가 나왔고 남송에는 주희, 곧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옛 문화는 태산과 무이로다(東周出孔丘 南宋有朱熹 中國古文化 泰山與武夷)"란 말이 있다. 주나라의 공자가 태산에서 유학을 창시하였듯이, 남송 때 주희는 무이산에서 신유학인 주자학을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무이산은 주자가 완성한 신유학 곧 성리학을 배출한 성지이다. 그러기에 주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희가 머물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읊으면서 주자를 흠모했다.

 

주희는 무이구곡가로 본격적인 경치묘사를 하기 전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山無水不秀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水無山不淸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峯峯水抱流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흐른다.

 

무이산을 흐르는 물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이 물이 없으면 무이산도 한갓 메마른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주희는 이 무이산을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올라가면서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물은, 끊임없이 궁리하고 성찰하는 선비들의 맑은 지성이라고 풀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러한 것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보인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이산을 관광하는 코스가 개발돼 사람들이 많이 구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 관광코스는, 대나무로 된 배를 타야하는 관계로,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내려오는 코스로 설정돼 있어 주희가 읊은 무이구곡가의 진행방향과는 거꾸로다. 실제로 이렇게 상류에서부터 내려오는 식으로 구곡가를 읽으면 주희의 원래 의도와도 배치될 수 있다.

 

조선왕조로 내려와 동방의 유학에 새 장을 연 퇴계는 도산서당을 열고 후학들과 연구를 계속하면서 무이산에서 학문을 이룬 주희를 자신의 생활의 모범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희의 무이구곡가의 운을 빌어서 새로 10수의 한시를 짓는다. 이 「차무이도가(次武夷櫂歌)」 10수는 주희에 대한 퇴계의 존경심이나 퇴계의 시를 짓는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유학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회암(晦庵:주희의 호)과 퇴계의 차이를 엿보게 한다는 뜻에서 대조가 되고 있다.

 

주희가 지은 무이구곡가의 첫머리는 무이산에 대한 개황이다.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영(靈)이 있고

山下塞流曲曲淸 산아래 골짜기는 굽이굽이 맑도다

欲識箇中奇絶處 가장 멋있는 곳 알려고 한다면

櫂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세 가락 천천히 들어보소

 

단순한 경치만을 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 경치를 학문의 경지를 설명한 것으로도 해석한다. 학문을 하면 그리 멋있는 선경에 들어간 것 같다는 뜻이리라. 여기에 대해 퇴계는 靈(영), 淸(청), 聲(성)의 세 운자를 그대로 받아서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한다. 자신은 주희를 따라 깊은 학문의 경계를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한다.

 

不是仙山詫異靈 신령스런 산이라 놀자는 게 아니라

滄洲遊跡想餘淸 주희 있던 유적 보려는 것

故能感激前宵夢 어젯밤 꿈에 선생 본 감격 살려

一櫂賡歌九曲聲 구곡가 운을 빌어 다시 노래하세

*賡(이을 갱)​

 

여기서부터 무이산의 아홉 계곡으로 들어간다.

 

 

1곡(一曲). 곧 첫 계곡의 북쪽에는 대왕봉이 솟아있고 대왕봉 왼쪽에 만정봉(幔亭峯)이 있다. 만정봉은 해발 500미터정도의 산으로,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峯影潛淸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煙

 

일곡 강가에서 낚시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맑은 물속에 잠겨있네

무지개다리 끊어진 후 소식 없고 골짜기 봉우리마다 푸른 안개 자욱

 

이 첫째 계곡은 그냥 보면 만정봉의 경치를 설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공자 이후에 학문이 끊어져 사람들이 가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시에 대해 퇴계는 선, 천, 연의 세 운자를 살려 학문을 시작한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멀리할 수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我從一曲覓漁船 天柱依然瞰逝川

一自眞儒吟賞後 同亭無復管風煙

 

일곡에서 어선 찾아갔더니 천주봉은 의연히 내를 굽어보고 있네

참 선비 이곳서 시 지어 읊은 뒤로 동정의 좋은 풍경 더 못 보네

 

이곡(二曲)에는 유명한 옥녀봉(玉女峯)이 있다.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하다고 한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광택이 나서 마치 옥석을 잘라 조각한 모습으로, 절색의 소녀가 맑은 물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옥황상제의 딸이었던 옥녀가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우연히 대왕(大王)과 만나 인간세계에 살았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옥녀와 대왕은 돌로 변해 계곡의 양쪽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주희의 시를 보면 마치 학문의 깊고 아름다움을 설파하는 것 같다;

 

二曲停停玉女蜂 揷花臨水爲誰容

道人不複荒臺夢 興入前山翠幾重

 

이곡에 우뚝한 옥녀봉이여 누구 위해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는가?

그대 막을 도인은 없는데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퇴계도 비슷한 분위기로 시를 쓴다;

 

二曲仙娥化碧峰,天妍絕世靚脩容。

不應更覬傾城薦,閶闔雲深一萬重

 

이곡의 선녀가 봉우리로 되었나 하늘이 낳은 미인 정말 아름다워라

경국미색 다시 추천 바라지 말게 하늘문의 구름은 몇 만 겹 쌓였네

 

* 靚 : 단장할 정

* 覬 : 바랄 기​

 

3곡에는 천 길 절벽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소장봉에는 아득한 절벽 위 틈 사이에 배 모양의 목제 관이 있으니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가학선관(架壑船棺)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虹橋板)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선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전설에 이르기를 가학선관은 신선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남긴 배(舟)로서 배 안에는 유골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바람에도 썩지 않고 천년을 그대로 있다. 주희는 학문을 하던 도중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좌절하는 순간들을 읊은 것으로 해석된다;

 

三曲君着袈壑船 不知停櫂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敢自憐

 

삼곡에서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 젖기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상전벽해가 그 언제런가? 거품 같고 바람 앞 등불 같은 가련한 인생이여

 

 

사곡으로 돌아들면 엄청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름하여 대장봉(大藏峯)이라 했으니, 도가(道家)가 대장경(大藏經)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가운데서 가장 깊은 곳이다. 와룡담에 이르러 뱃사공은 길다란 대나무 삿대를 물속에 집어넣지만 끝에 닿지는 않는다. 대장봉 건너편에 제시암이 있는데, 암벽에 석각의 시를 가득 새겨 놓았다. 북쪽에는 선조대(仙釣臺)가 있으니,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다. 선조대 절벽 위 바위틈에는 낚시대 한 개가 비스듬히 나와있다. 사람들은 강태공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四曲東西兩石巖 巖花垂露碧氈참

金鷄叫罷無人見 月滿空山水滿潭

 

4곡의 양쪽에는 두개의 바위산, 이슬 맺힌 바위틈 꽃은 푸른 담요같네

금닭(金鷄) 혼자 울어 아침을 여는데 하늘엔 달 가득 계곡은 물 가득

 

이제 드디어 오곡으로 들어선다. 오곡은 주희가 무이정사를 세워 살던 곳이다. 무이구곡의 중심으로서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을 말한다. 산은 높고 구름이 깊어 연우가 항상 평림의 입구에 가득한데, 나그네 즉 주자가 수풀 속을 거닐 때 들려오는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는 감정을 노래했다.

 

 

 

五曲山高雲氣深 長時煙雨暗平林

林間有客無人識 欲乃聲中萬古心

 

오곡은 산 높고 구름 깊어 언제나 구름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사이 나그네 알아보는 이 없고 사공의 노랫가락에 만고수심 깊어지네

 

퇴계도 심, 림, 심 세 자를 차운해서 아래와 같이 읊는다.

 

當年五曲入山深 大隱還須隱藪林

擬把腰琴彈月夜 山前荷 肯知心

 

오곡의 깊은 산 들어가니 은거하던 선비들은 어디 있는고

달밤에 거문고 뜯어본 들 저 산 앞의 초부가 알아주련가

 

무이구곡은 6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에는 수백개의 물줄기 자국으로 쭉쭉 내려가며 파여 장관을 이룬다. 주희는 쇄포암 아래를 찾아 저절로 바위꽃이 떨어지고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는 자연의 극치를 노래하였다. 계곡 양쪽은 높은 절벽이 막아 메아리가 부딪치며 멀리 퍼져나간다. 절벽에는 주자가 새긴 "서자여사"(逝者如斯)란 글도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세월은 이처럼 흘러가는가,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라는 말의 준말이다.

 

六曲蒼屛繞碧灣 茅茨終日掩柴關

客來倚櫂巖花落 猿鳥不驚春意閑

 

육곡의 푸른 병풍은 물굽이 휘감아 돌고 이끼는 종일토록 사립문 덮고 있네

나그네가 노에 몸을 기대니 꽃잎 휘날리고 봄빛에 원숭이와 새들이 한가하네

 

 

7곡에 들어서면 멀리 삼앙봉(三仰峯)이 보인다. 해발 717미터로 무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커다란 세 개의 봉우리가 층층히 일어나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높은 산이 물가에 솟아 절벽을 이룬 금계동(金鷄洞)을 지나 방생담(放生潭)의 물이 돌아가는 곳에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도원동으로 들어가는 산문이 있다.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道寒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 올라서니 은병봉 선장암이 다시금 보이누나

지난 밤 봉우리에 비 내리더니 공중을 나는 물줄기가 그 몇이던가

 

8곡은 산이 높아 물살이 빠르고, 각종 동물 모양의 바위가 많다. 팔곡의 정경을 사람들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덧 신선이 사는 곳이 가까왔음을 말하고 있다. 팔곡의 북쪽에는 3개의 커다란 바위가 품(品)자 모양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의 삼교를 가리킨다. 주희는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八曲風煙勢欲開 鼓樓巖下水영廻

莫言此處無佳景 自是遊人不上來

 

팔곡에 바람 불어 구름 개려 하는데 고루암(鼓樓巖) 아래에는 물이 돌아드네

이곳에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마소. 여기부터 속인은 올라갈 수 없다네

 

퇴계도 팔곡을 따라 올라가며 또 한수를 보탠다.

 

八曲雲屛護水開 飄然一棹任旋회

樓巖可識天公意 鼓得遊人究竟來

 

팔곡의 구름병풍 물 굽어도니 표연히 노를 저어 따라 돌아보자꾸나

고루암 살펴보면 하늘 뜻 알지니 여러 사람들과 다시 같이 오자

 

구곡을 올라서면 이윽고 무이산 경계의 마지막인 절경인 평천이라는 곳이 된다. 마지막이라고는 하지만 상류에서부터 시작하면 첫 문이 되기도 한다. 이곳은 개천이 평평하게 흐르는데, 뽕나무ㆍ삼나무가 들을 채우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무릉도원의 경치를 보여준다. 이 평천이야말로 학문과 정신의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 현실이 된다. 이처럼 학문의 길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마침내 정신적인 개안을 얻게 되었다라고 주희는 마지막 시에서 밝히고 있다. 그로서는 공자 이후 처음으로 유학을 통해 철저히 개안하고 각성해서 우주 속에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도덕적인 완전인간으로 거듭 태어나 세상에 밝은 빛을 던져주게 된 것이라는 확신이 선 것이다.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구곡에 다달으니 눈앞이 활연히 트이고 상마(桑麻) 이슬뒤로 평천(平川)이 있네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도원 가는 길 찾지만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

 

퇴계도 이 마지막 시에는 한층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九曲山開只曠然 人煙墟落俯長川

勸君莫道斯遊極 妙處猶須別一天

 

구곡의 산이 열려 갑자기 훤해지니 연기와 마을이 긴 강을 굽어보네

여기가 놀이의 끝이라 생각 마소 또 하나의 절묘한 곳 남아 있으니

 

마지막 부분에서 이채를 띄는 것은, 주희는 8곡에서부터 일반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는 전인미답의 경치라며 별천지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퇴계는 8곡에서 일반인들을 더 불러들이자고 하고 있고 마지막에도 여기가 최종이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또 있다고 새로운 목표를 던져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의 차이가 두 사람의 일생도 다르게 만든 것 같다.

 

깊은 산 속에 살면서 벼슬도 제대로 안하게 되면 생활은 자연히 궁핍할 수밖에 없다. 주희도 마찬가지고 퇴계도 마찬가지였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희는 학자들을 대접하면서 거친 밥을 내놓곤 했다. 너무 가난해 술과 닭을 대접할 만한 여유가 없었으며, 자신의 친구인 유청지(劉淸之)에게도 채소만 있는 검소한 식사 이상은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도 자신의 집을 방문한 권율의 아버지에게 평소 식사 때와 똑같은 거친 밥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권율의 아버지가 식사 도중에 도저히 못 먹겠다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호굉이란 사람이 무이산으로 주희를 찾아왔다 그는 주희로부터 채소와 밥만을 담은 식사대접을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무리 무이산에 술 한 병과 닭 한 마리가 없었겠는가?"라며 자신에 대한 박대를 원한으로 새기고 1196년 감찰어사 심계조(沈繼祖)를 통해 황제에게 탄핵문을 올렸다.

 

재상인 조여우가 거짓된 가르침을 확산시키는 무리의 우두머리이며, 주희를 조정에 끌어다놓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탄핵했다. 좋은 쌀로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은 불효막심한 인간이라는 등 6가지 주요한 죄악과 비구니 둘을 유혹하여 첩으로 삼았다는 등의 4가지 악행이 적힌 탄핵문을 올리자 주희는 시강(侍講)의 직위와 사당 관리직에서 해임되었고, 그것으로 현실 정치영역에서의 경력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주희의 위대한 점은 그런 세속적인 영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친 점이었다. 주희는 저술ㆍ주석ㆍ편저만 80여종에 달하며, 편지가 남아 있는 것도 2,000편에 이른다. 140편에 이르는 그의 대화록도 한 사람의 대화록으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량이며, 어떤 신유학자보다도 많은 467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러한 주희의 생활을 자신들의 교과서로 삼았다.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읊으면서 주자를 흠모했다. 그러기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며 무이산 은병봉(隱屛峯)에서 이름을 따와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으며 무이구곡가를 본따서 시조형식으로 고산구곡가(孤山九曲歌)를 지어 우리 산천을 노래했다.

 

그 후대에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은 화양계곡에 은거하며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경상도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이름도 무이산과 관련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무이산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방마다 걸어놓고는 무이산의 경치를 상상하고 주자의 학문을 흠모했다.​

 

여기서 다시 퇴계를 생각해 본다. 퇴계는 일찍이 "동방의 주자"로 불리어 왔고, 퇴계 스스로도 주희를 존숭(尊崇)하고 주자학의 정통을 잇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퇴계가 "액면 그대로의" 주희를 추종, 답습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상이란 것은 사상가가 직면한 당대 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퇴계를 고뇌하게 했던 16세기 조선의 시대 상황은 주희가 직면했던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시대 상황과 달랐던 만큼, 비록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그 내포는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스케일을 빌어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 담론의 수립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퇴계는 주희가 세운 거대 담론의 현실적 운용 내지 현실적 정착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주자학은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담론으로서 거의 완벽한 체계를 자랑하게 되어 그의 사후 백여 년 뒤에 정부의 모든 시험에 공식 답안이자 기준으로 채택되었지만 시대를 흘러 내려오면서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식화, 박제화 되어 현실과 많은 괴리를 드러내게 된다.

 

정신사적으로 이러한 괴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흐름이 주자학계 내부에 일어나게 되는데 퇴계의 사유는 바로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희는 자신이 새 학문을 완성한 만족감을 보였지만 퇴계는 그러한 학문을 찾아가는 길을 더욱 열심히 가야한다며 완성보다는 더 많은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가 무이구곡을 두고 읊은 두 사람의 시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국과의 교류가 심화 확대되면서 그동안 우리 학자들이 꿈에만 그리던 무이산의 아름다운 경치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고 있다. 이 무이산이 우리의 정신사에 이러한 영향을 끼쳤고 그런 교류가 있었다는 점, 왜 우리나라 선인들의 글이나 그림에 구곡가나 구곡도가 그리 많았는가를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추구했던 세계는 어떤 것이었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