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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어명을 어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23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자손들이 본 영월군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 땅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절의를 부추기어 장려하는 것으로 뽑아서 쓰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는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1699년) 1월 5일치 기사입니다. 여기서 노산군은 단종임금을 가리키며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하여서 거기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지요. 그때 목숨을 걸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엄흥도(嚴興道, 1404-1474)입니다. 그 뒤 엄흥도는 어명을 어기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러준 일로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종 때 그의 충절이 조정에서 논의되어 1698년에 공조좌랑, 1743년에 공조참의, 1833년에 공조참판, 마침내 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게 됩니다.

 

엄흥도의 자손들 곧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회에서는 지난 11월 12일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희귀 고문서와 족보 등 4책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냈습니다. 맡긴 자료는 종손 엄근수가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로 이 가운데 완문(完文)은 1733년(영조 9)에 병조에서 발급한 관문서(官文書)로, 세로 37.4㎝, 가로 205㎝이며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충의를 기려, 그의 후손들에게 군역(軍役)과 잡역(雜役)을 면제해 줄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완문 외에도 엄흥도 편지(1464), 《영월엄씨족보》(1748)도 있으며 종손인 엄근수 씨는 “귀한 자료를 집안에 두기보다는 국가기관에 맡겨서 안전하게 보관되고, 아울러 많은 사람이 보고, 연구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맡긴 뜻을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