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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지금, 이 순간이 쌓이면 일 년이다

매 순간순간 흔들리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가보기
[솔바람과 송순주 2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 동진(東晋)의 정치가 사안(謝安, 320∼385)은 국난을 구해낸 명재상으로 유명한데, 정치에 나오기 전에 동산(東山)에 은거하고 있다가 조정의 부름을 거듭 받고 할 수 없이 나와서 환온(桓溫,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동진-東晉의 정치가)의 사마(司馬, 중국 주(周)나라 때 벼슬)가 됐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약을 보냈는데, 그중에 원지(遠志)라는 약초가 있었다. 환온이 그 약초를 들고 사안에게 묻기를 “이 약초의 다른 이름이 소초(小草)인데 어찌 하나의 물건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가” 하자, 사안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동석한 학륭(郝隆)이라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산속에 있을 때는 원지라고 하고 산을 나오면 소초라고 합니다” 하자, 사안이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원지 혹은 소초라는 말은 명성은 요란하지만, 실제 일을 하는 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대해서 놀리는 말이 됐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출사하기 전에 고향인 안동 땅에 원지정사(遠志精舍)라는 작은 건물을 지었다. 세상에 나가기 전에도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가서는 일을 제대로 한 것이 없어 마치 소초처럼 된 것이 아닌가 부끄러워하며 시골에 은거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바로 중국 사안의 원지 소초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뒤에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움으로써 동진의 사안보다도 더한 이름을 우리 역사에 남기게 됐다. 그야말로 풀이름인 원지가 선비의 길고 원대한 뜻을 대변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

 

‘원지’라는 집 이름과 비슷한 ‘원우(遠憂)’를 집 이름으로 쓴 사람이 있으니 유성룡보다 반세기 뒤에 활동한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이다.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했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효종 조에는 영의정을 지냈는데, 재상이 되기 전에 충남 부여 들녘 경치 좋은 곳에 집터를 잡아 아름답게 꾸미고는 원우당(遠憂堂)이라 이름했다. 사람들이 이리 좋은 곳을 차지하고서 왜 멀리서 근심한다는 이름을 붙였냐고 물으니,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우리 임금이 잘 계시는가, 정치를 잘하시는가, 매번 걱정돼 그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해줬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 마음이 조정에 전해졌는지 이경여는 병자호란 때 왕을 잘 모셔서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유성룡처럼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서가 아니라 단지 임금을 잘 모셔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로 기억될 뿐이다. 애초에 유성룡은 크게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의 역량이 이에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했지만, 이경여는 나라보다는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 머물렀기에 개인적으로는 출세하고 부러움을 샀지만, 역사에서는 그리 높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멀리서 걱정을 하고 뜻을 세웠는데 그 뜻의 방향이 애초부터 달랐기에 그 결과도 달랐을 것이다.

 

유성룡은 원지정사를 준공하고 나서 쓴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인 것이고(遠者 近之積也) 뜻은 마음이 가는 방향이다(志者心之所之也).” 멀다는 것, 먼 시간도 눈앞의 순간이나 시간이 쌓이는 것이고, 순간순간의 마음이 이어지면 그것이 뜻이 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눈앞 자신의 행동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모이면 멀고 원대한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마음 방향을 올바로 세우고 그 마음을 계속 이어가면 그것이 올바른 뜻이 돼 마침내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제갈량이 자기 아들에게 해준 말이자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에 남긴 ‘영정치원(寧靜致遠: 마음을 차분히 하고 뜻을 바로 세워야 자신의 원대한 뜻을 이룰 수 있다)’이란 말인 것이다.

 

새해는 또 다른 시작이고 늘 새로운 포부와 희망을 건다. 올해는 쥐의 해. 어느 동물보다도 빠르고 민첩하고 꾀가 있어서 늘 재물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동물. 그래서 쥐의 해는 우리의 삶에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많이 오고 경제적으로도 더 풍요해질 것으로 기대하는 해다. 그렇지만 눈앞의 이익을 좇으며 아등바등하다가는 금방 연말이 되고 그러면 그때 가서 또 후회하게 된다. 내가 이런 소중한 시간을 또 허비했구나 하는 후회인 것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거창한 각오로 뭔가 큰 것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매번 중단한 경험은 너무나 많다. 아주 작은 결심이나마 그것을 뜻으로 세워 꾸준히 추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일 년이란 시간이 긴 것 같지만 매 순간순간이 연장되는 것이기에 흔들리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가보자.

 

지난 연말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스러웠던 그 마음을 돌이켜보라. 작은 목표로나마 올바르게 새해를 시작해 뚜벅뚜벅 가다 보면 올 연말에 우리는 지난 연말보다 한참 멀리 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매번 새해를 맞이하는 절차를 치르는 의미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