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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조선시대 백성의 집은 게딱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1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상하 신하와 백성의 집에 정한 제도가 없어, 서민 집이 분수에 넘치게 관료 집을 따라가고 관료 저택은 감히 궁궐과도 비슷하다. 사치와 아름다움을 다투어 숭상하여 상하에 순서가 없게 되었으니, 실로 옳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칸으로 하고, 대군은 여기에 10칸을 더하고,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하며, 백성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하라.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말고, 화공(花拱, 기둥머리의 꽃모양 장식)과 진한 채색과 단청을 쓰지 말고 검약에 힘을 쏟도록 하라.”

 

 

이는 《세종실록》 13년(1431) 1월 12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얼마나 집을 호화스럽게 지었는지 세종은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한다는 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종실록》을 보면 “무령군 유자광의 집에 분수에 넘치게 연석(鍊石)을 사용했으니 대신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청컨대 유자광을 죄주고 연석을 철거하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나와 성종 때에 와서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다. 그 가운데 대략 지어놓은 집이라 할 만한 것은 움막도 아니고 참호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질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 이는 《정조실록》 14년(1790) 2월 11일 기록으로 양반들에 견주면 백성의 집은 게딱지 같을 정도였다는 얘기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