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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조운선 침몰에도 사람 죽지않아 매우 기쁘다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4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남을 생각하는 의식

 

코로나19로 새로운 사회적 현상과 의식의 흐름에 변화가 오고 있다. 대개 그간의 유행성 감기는 혼자 조심하여 몸을 살피면 걸렸더라도 이어 낫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코로나19는 그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삶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일원이라는 개념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개인이 전체 속의 하나인가 아니면 전체로서의 하나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방역에 대응하는 국가에서는 개인이 나라의 일원이지만 방치하는 국가에서는 나라와 별개의 일원이 되는 모양새다. 정치와 의료체계가 어떻게 개인을 포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따라 달라지고 있다.

 

방역 대응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우리에게 되묻는다.

 

1) 의료체계가 수익자 부담 위주냐 사회복지 체계 속에 있는가. 개인의 의료 문제냐 국가의 치료 체계냐.

2) 코로나가 모두 걸렸다 낫는 집단 방역이나 개별 치료냐.

3) 방역의 대비는 그 나라 사회적 문화냐 개인의 민주시민 성숙도냐 등이다.

 

우리나라가 지금은 다시 확장세 속에 있지만 4월까지만 해도 통제를 잘 해 K방역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가 됐는데 이에 견주어 일본이나 유럽 일부 비평가는 가)유교의 전통으로 국민이 원래부터 순종적이다. 나)군사정권의 후유증으로 전체에 순응한다는 등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고 이에 견주어 일본에서는 스스로 민도가 높아 크게 퍼지지 않는다는 등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마스크를 잘 쓰고, 손을 잘 씻고, 집합모임을 삼가는 등 개인과 방역 당국의 적절한 조치는 먼저 내가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하겠다는 이기적 동기가 있더라도 나아가 남에게 하다못해 내 가족에게라도 옮기지 말아야 하겠다는 선의의 이타적 발로가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통틀어 문화의식 혹은 민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 25 전쟁 피난을 겪은 어른들이 아직 주위에 있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피난민은 폭격을 맞기 전에는 쉽게 죽지 않았다. 전쟁으로 죽는 일과 코로나19로 죽는 일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코로나로 사망하는 생명이 적을 것 같은 데도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전쟁 때보다 코로나 시대가 더한 듯하다. 전쟁은 전장 곧 전투하는 지역이 있는데 코로나19는 전방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서는 전쟁터를 피하면 되는데 코로나는 어디가 전쟁터인지 구별이 안 된다.

 

‘거리는 떨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표현이 지금 시대의 화두인데 이 시대를 이겨 나아가려면 누구나 조금은 도를 닦는 수련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 19’는 단순히 유행병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체계를 다시 조정하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직접 대면(contact)에서 비대면(untact) 그리고 요즘에는 간접대면 곧 ontact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비대면 학습에서 간접대면으로 전 수강생 상호 비대면 학습, 줌 영상회의와 토론, 기타 스포츠, 종교 행사, 연예공연 등 다양하다.

 

뉴노멀(new normal)이라 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뉴노멀은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기준으로 특정 위기 이후 몇 년간 세계경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온라인 쇼핑, 인터넷 구매, 택배 등의 증가가 한 현상일 수 있다. 개인과 사회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코로나 시대에 세계가 직면하는 일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방역은 소홀하더라도 사회가 경제활동을 개방하느냐 아니면 그보다 사람의 생명을 중요시해 학교며, 공연장, 해외 입국자, 사업장 등을 원칙적으로 개방하며 적절히 통제하느냐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규모에서 견줄 일은 아니지만 사고 등으로 재물의 손해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세종 시대의 몇 예를 보자.

 

살았다니 내 마음이 기쁘다

 

몸만 면해도 기쁜 일 : 세종 4년 8월에 의정부에서 정여(鄭旅)를 보내어 계하기를, "경기도 해도 찰방 윤득민(尹得民)ㆍ충청도 해도 찰방 신득해도 또한 이달 초2일에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군인도 물에 빠져 죽었으니, 국문하여야 한다." 하고, 모두 국문하기를 청하매, 지신사 김익정 등이 계하기를, "신 등의 생각으로는, 득해 등은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 배가 파선된 것이니, 그의 죄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그러하나, 올해 들어서 이미 큰 사고가 나게 되고, 재변이 여러 번 일어나게 되니, 시운이 불길해서 그러한 것이다. 당초에 보낼 때 일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기필한 것도 아닌데, 이제 큰 바람을 만나 그들의 몸만 면한 것도 크게 기쁜 일이니, 국문하잘 것이 없는 일이다. 너의 말이 진실로 나의 마음에 부합된다.” 하였다. (《세종실록》 4/8/13)

 

배가 파선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이 무사하다니 ‘크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윤득민(尹得民)의 일은 이에 앞서 세종 2년에 상왕 태종이 양화도에 거둥하여 전함을 관람한 바 있었다. 여러 도의 전함이 왜선을 쫓아가다가, 왜선이 빨라서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다. 상왕이 한스럽게 여겨, 대호군 윤득민을 명하여 빠른 배 3척을 만들게 하였다. 귀화한 왜인을 시켜 왜선을 타고 10여 보가량이나 먼저 떠나가게 한 후, 득민과 대호군 최해산과 군기부정 이예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각기 배 1척씩 타고 쫓아가는데, 득민의 배가 항상 앞서게 되어 경첩하고 빠르기가 왜선보다 나았던 것이다. (《세종실록》 2/11/7)

 

세종 4년 7월 21일에는 왜선의 노략질에 대비해서, 윤득민을 경기도 해도 찰방에 임명하여 도적질하는 왜놈들을 방비하게 하였다.(《세종실록》4/7/21)

 

윤득민은 이어 공을 세웠다. 세종 4년 9월에는 경기 해도찰방(海道察訪)으로 있었는데 왜선(倭船) 한 척을 전라도에서 잡아 머리 1급(級)을 베어 보고하거늘 임금은 선온(宣醞, 술)을 가지고 가 위로하게 하고, 또 의복을 내렸다. (《세종실록》 4/9/23)

 

세종의 생명에 대한 중시에 대한 다른 예화가 있다.

 

사람은 살아 : 세종 25년 6월에 판관 박회(朴回)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바람에 떠밀렸던 배 88척이 고만량(高巒梁)에 도착하였는데, 그 침몰한 배 11척도 또한 미곡(米穀)을 상실하지 않았고, 오직 4척만이 완전 침몰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빠져 죽지는 않았습니다." 보고하자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변고는 근래에 없던 일이므로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고 염려했더니, 이제 치보를 들고 나는 매우 기쁘다 하고, 보고한 사람에게 의복 한 벌을 하사하고서, 이어서 승정원에도 술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나의 수천 백성들이 이제 다행하게 살아났으니 내 마음에 기뻐서 애오라지 제군과 함께 술자리를 베푸노니, 너희들도 또한 함께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궐내의 각사(各司)에도 술과 과일을 하사하여 경사를 기뻐하기를 함께 하고, 승전색 환자(宦者) 김충(金忠)에게 비단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대개 기쁜 일을 즉시 임금께 아뢴 덕이며, 또 여섯 승지에게도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25/6/7)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大悅曰) 그리고 ‘나는 매우 기쁘다.’(予甚喜悅)에서 보듯 종은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났음을 기뻐한다. 배의 파손이나 재물이 없어진 것은 부차적 문제인 셈이다.

 

다음 날에도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사람이 살아 : 박회(朴回)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처음에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이 바람을 만나서 표류 침몰하였다는 것을 듣고, 내 마음에 그 배에 탔던 천여 명의 사람이 다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아침저녁으로 걱정하여 근심하였었다.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네가 빨리 아뢰어 나의 진념하던 심회(心懷)를 풀리게 하였음을 아름답게 여겨 특히 옷 한 벌을 하사하니, 너는 이를 받을지어다." 하였다. (《세종실록》 25/6/8)

 

‘予心喜悅’(여심희열) 곧 ‘나는 매우 기쁘다.’라는 《세종실록》 가운데 이 두 곳에서만 보인다. 그만큼 마음으로부터 ‘사람의 목숨’에 대해 중시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실록을 쓰는 사관들의 문장 성향도 다를 터이지만 특히 생명과 관계된 반응에서 ‘내 마음이 기쁘다’라는 표현은 진심인 것이다.

 

어느 시대나 먹고사는 경제가 중요하냐, 사람의 목숨이 우선이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나라에 따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둔감해진 지금 사람을 중시 여긴 세종의 정신과 정치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