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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자연스럽고 소박한 도살풀이 춤사위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8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도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였던 김숙자의 수제자, 최윤희(본명, 최영순)는 현재 대전시 무형문화재 ‘입춤’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춤을 좋아했고, 흥이 많았던 소녀로 유홍란을 통해 김숙자 문하에 들어가 선생 댁에 기거하면서 5년여 전통춤의 기본 동작과 춤사위, 발 디딤새, 호흡, 등을 착실하게 배웠다.

 

최윤희가 스승 밑에서 열심히 배운 <도살풀이춤>이란 <도당굿 살풀이춤>을 줄인 말이다. 이 춤은 예인무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는 살풀이춤의 원초형으로 원래 흉살(凶殺)과 재난(災難)을 소멸시켜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기원과, 나아가 행복을 맞이한다는 종교적 소원에서 비롯된 춤이다. 이 춤은 춤사위가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삶의 깊은 뜻이 있는 춤이며, 특히 흰색의 긴 천을 들고 추는 것이 특징인데, 그 긴 천에 의한 공간상의 유선이 훨씬 다양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춤이다.

 

스승에게 배운 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로 완전히 소화한 뒤, 일반 수강생들 앞에 조교의 역할을 다 하였다고 한다. 매매일을 춤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스승 밑에서 춤 공부에 여념이 없던 1978년 봄 어느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판소리나 병창, 기악, 민요, 춤꾼들이 기다려 온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일정이 공고된 것이다. 당연히 최윤희도 스승과 의논하여 출전의사를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생활이란 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춤으로 시작해서 춤으로 끝났을 정도였으니 누구보다도 자신감을 가지고 출사표를 던졌고, 실전 무대에서도 후회 없이 평소 스승으로부터 배운 춤 솜씨를 자신 있게 선보였다고 한다.

 

객석의 반응은 최윤희의 장원을 확신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을 비롯한 춤 관계의 인사나 주위 사람들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장원>이 확실하다고 했는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2등인 <차상>에 그쳤다. 간혹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경연이기 때문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최윤희는 깨끗하게 승복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남들 같으면 처음 나간 큰 경연무대에서 입상만 해도 다행이라고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도 2등의 차상이면 만족할 만도 한데, 최윤희는 크게 실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도전을 선언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재도전을 선언하는 것은 패기 있는 젊은이의 당연한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찬성해 주고 격려해 준다.

 

그런데 최윤희는 재도전하기 위해, 아니 춤꾼으로 성장하기 위해 홀로서기, 곧 독립하겠다는 결심을 해서 주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는데, 그의 태도에 스승도, 가족도, 주위의 친지들도 ‘아직 이르다.’, ‘더 공부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라는 이유로 만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의 결심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번 굳힌 결심을 재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위의 반대를 설득하며 홀로서기의 실천을 강행한 것이다.

 

비록, 몸은 스승의 곁을 떠나지만, 오히려 스승의 춤을 더 깊이 연구해서 <도살풀이춤>의 기량향상과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안고 그는 광주로 향했다.

 

전남 광산군(현 광주시 광산구)에 ‘광산고전무용학원’을 개설하고 원장 겸 사범이 된 것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무용학원을 개설하며 타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력과 기량뿐이라고 생각하며 피눈물 나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오직 스승 김숙자의 모든 춤을 스스로 체득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기량을 쌓아가고 있을 때였다.

 

전년도 <차상>에 그쳐 더 열심히 춤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었던 전주대사습놀이 대회가 또다시 열리게 된 것이다. 그로서는 재도전할 수 있는 설욕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스승에게 배운 춤 실력을 바탕으로 광산학원을 열고, 혼자서 춥거나 덥거나 가리지 않고 열심히 연습해 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경연 결과는 최고상인 <장원>을 한 것이다. 비록 스승의 곁을 떠나 있던 상태였으나, 스승에게 배운 <도살풀이춤>으로 수상하게 되었으니 본인의 기쁨은 물론이고, 스승 또한 매우 만족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윤희 원장은 스스로 연습에 몰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후진의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당시 가르쳤던 제자들이 무용을 전공으로 해서 대학에 진학했을 때도 큰 보람을 느꼈고, 졸업한 뒤 <전남도립국악단>과 같은 전문인 단체에 입단하여 실력을 과시했을 때도 큰 보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그 제자들이 성장하여 현재까지 전국에서 전통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때 자신이 내린 결정에도 후회는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최윤희가 김숙자 류의 진품 춤으로 이름이 나고, 스승의 계승자로 점차 알려지고 있을 때인 1985년, 그가 29세 되던 해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예술 축제, 진주의 <개천예술제>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