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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징비록》에 열광한 일본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3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조선팔도의 7-8할은 쓸쓸한 황무지로 변하여 농사짓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숲속을 숨어 헤매며 굶어 죽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또는 들판, 산, 숲속으로 숨지 못하고 적에게 살해당한 시체, 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안타까운 것은 두세 살 되는 아기가 엉금엉금 기면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이었으니, 그 누가 이를 연민하지 않으랴. 그 누가 이를 한탄하지 않으랴. 조선의 승상(丞相) 류성룡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솔잎과 나무껍질을 가루로 만들고 쌀가루를 섞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식량에는 한도가 있고 굶주린 사람은 한이 없어서 마침내 이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일본의 대하소설 《에혼 다이코기(絵本太閤記)》 7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렸네요. 특히 두 세 살 되는 아기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은 이를 읽는 저로서도 가슴이 저립니다.

 

위 소설에 류성룡이 나오지요? 이 소설의 장면은 작가가 서애 류서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한 것입니다. 징비록이 뭡니까? 서애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기록 아닙니까? ‘징비’라는 것이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것이지요. 그런데 징비록의 내용이 1797년부터 6년간에 걸쳐 일본에서 출간된 대하소설에 나온다니 뜻밖이지요?

 

 

징비록은 17세기 후반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 밀반출되어, 1695년 《조선징비록》이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이종각 교수는 ‘일본인과 징비록’이란 글에서 징비록은 그 후 최소 30여종 이상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징비록은 일본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었답니다.

 

더욱이 《에혼 다이코기》와 같은 임진왜란을 다룬 전기, 소설류인 조선군기물(朝鮮軍記物)에도 징비록이 빈번히 인용되면서 징비록은 일본 서민들에도 인기가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전통극 조루리에도 류성룡이 등장하는 극이 있었다는군요. 이렇게 징비록이 인기다 보니 1750년판 《교토본 징비록》에는 징비록 책 광고까지 실렸다는군요. 일본인들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된 것도 《징비록》을 통해 이순신 장군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종각 교수는 에도 시대 중기엔 일본 사회에 ‘징비록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징비록 현상’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단순히 《징비록》을 번역 출간, 인용만 한 것이 아니라, 징비록과 관계없는 책에도 ‘징비록’을 갖다 붙였다는군요. 곧 에도에 목조건물이 밀집하면서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그런 화재를 다룬 소설에서도 화재를 반성하고 대비하자는 의미로 제목에 ‘징비록’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자들은 ‘징비록’ 내용을 소재로 삼아 한시를 짓기도 하고요. 정말 이 교수님 말마따나 ‘징비록’ 현상이라고 할 만 하군요. 그리고 《조선징비록》은 19세기 말 일본에 체류한 중국학자 양수경에 의해 청나라에 전해지고, 또한 같은 시대 주일 영국외교관 윌리엄 조지 아스톤이 《징비록》의 내용을 영문저술에 인용하는 등 임진왜란을 다룬 사서로는 《징비록》이 지금까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가장 높이 평가되고, 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징비록》이 이렇게 일본에서 인기몰이하는 동안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원래 서애가 조선의 미래를 위하여 쓴 책이니, 최소한 《징비록》이 일본보다 더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1647년경 서애 후손이 징비록을 펴낸 이래 4차례 간행되어, 일본보다 발행편수가 훨씬 적고, 한 번 발행한 권수도 2백 부 정도로 일본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서민들까지 징비록을 읽을 수 있게 번역을 했지만, 조선은 한문으로만 출간하였고, 다만 오리 이원익 가문에서 여자 후손들에게 읽히기 위해 만든 《광명번역징비록》이 전해 내려오는 정도라는군요. 그러면 징비록에 관한 학술적 연구라도 우리가 먼저이어야 할 텐데, 이 또한 일본 학자가 빨랐습니다. 1927년 이나바 이와키치가 일본 게이오 대학 사학회의 잡지에 발표한 ‘초본징비록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징비록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라는군요.

 

그것 참... 서애 선생은 우리 후손들이 다시는 이런 국난(國難)을 겪지 말라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징비록》을 저술하신 것인데, 정작 우리 후손들은 무관심하고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징비록》이 인기를 얻다니... 지하에 계신 서애가 이를 알면 얼마나 통탄할까요? 후손으로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