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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하규일에게 가곡을 배운 기녀, 진향(眞香)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곡도 스승에 따라, 또는 부르는 이의 개성에 따라, 그 음악적 분위가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1993년,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이라는 악보 책을 펴낸 김진향은 어린 시절 권번에 들어가 하규일로부터 여창가곡을 배웠기에 저술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전통가곡은 창법이나 표현법 등이 비교적 점잖고 느리게 부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60여 년 전, 스승에게 배운 노래를 기억하며 악보책을 펴낸 진향은 국악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를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진향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이다.

1916년, 서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타계하면서 집안이 망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권번으로 들어가 기녀의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올해 105세의 할머니가 된다.

 

오래전, 모 방송국 FM 라디오에 희귀음원을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때마침 기생 신분이었던 김진향의 녹음본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진향과 만난 진행자는 “선생님과 대담을 하고, 여창가곡 한 곡조 녹음하러 나왔다”라고 인사를 하였더니, 진향의 반응은 다소 걱정스러운 태도로“다 늙은 목소리를 녹음해서 뭐 하려고? 가사도 다 잊었는데….”라며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먼 길 찾아온 손님을 위해 비록 잊힌 노래일지라도 진향은 열심히 불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리가 맑고 깨끗하리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지글지글 세월의 굴곡과 오랜 흡연으로 거칠어진 70대 할머니 음성이 왠지 시리고 안쓰럽다.”라는 소감을 남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기운이 쇠한 후에 나오는 소리나 춤 등은 전만 같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가 어린 시절에 배운 가곡도, 당시에는 꽤나 예쁜 음성으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었을 것이나, 환경이 바뀌고, 노래를 잊고 살다가 나이 들어 긴 호흡으로 부른다는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치 않다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진향은 노래 공부뿐 아니라, 글짓기나 쓰기 등, 언어 능력도 남달라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가기도 했던 엘리트 여성이며 문학여성이었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어느 날,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를 유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 준 조선어학회의 스승, 신윤국이 함흥에 있는 구치소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진향은 곧바로 귀국하고, 함흥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은 그 사건 자체가 조선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기에 스승의 면회는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면회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진향의 고민은 깊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한 궁리를 수없이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길이 바로 자신이 함흥권번의 기생이 되는 길이었다. 기생이 되면 법조계 인사들과 만나게 될 수도 있고, 그들을 통해 스승과 면회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승을 만날 수 있는 면회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스승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았지만, 별무신통(別無神通)이었다. 스승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실의에 차 얼마쯤 지났을 때였다.

 

그녀 앞에 함흥의 <영생여자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백석(白石)이 나타난 것이다. 백석은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엘리트 영문학도였다. 그는 교내 행사를 마치고 교사들과 함께 진향이 있는 곳으로 회식 차 나왔는데, 진향을 만나면서 눈과 마음을 빼앗겨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의 결혼을 끝내 용인해 주지 않았기에 부모와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던 백석은 진향이 살고있는 서울로 도망쳐 살림을 차리고 3년동안 함께 지냈다고 한다. 함께 살면서도 백석은 수시로 진향에게 만주로 함께 도피하자고 설득을 했으나, 진향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기에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그 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그 뒤의 소식으로는 백석이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하나,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고, 백석은 북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한편, 남쪽의 진향은 백석과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리고 많은 돈을 모으게 되었다. 훗날, 진향은 그가 모은 전 재산을 법정스님께 시주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생겨난 절이 오늘의 성북동 소재 <길상사>다. 어느 기자가 물었단다.

 

“ 천억이나 되는 재산을 기부하셨는데, 아깝지 않으신지?”

“1,000억, 백석의 시 한 줄 값도 안 되지!, 나도 다시 태어나면 시를 쓸 테야”라고 했다던가? 진향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詩)를 짓고, 그 시에 음률을 얹어 부르는 노래가 곧 가곡(歌曲)임을

알고, 그 노래의 가치를 우리 사회가 보다 친근하고 따듯하게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