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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국보지정

가야 목걸이, 조선시대 한의학 책, 17세기 공신모임 그림병풍 보물 지정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고려시대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국보로 지정하고, 15세기 한의학 서적 ‘간이벽온방(언해)’와 17세기 공신들의 모임 상회연(相會宴)을 그린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그리고 가야문화권 출토 목걸이 3건을 포함해 모두 5건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국보 제333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은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希朗大師)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祖師像;僧像)으로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희랑대사: 구체적인 생존시기는 모르나 조선 후기 학자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유가야기(游加耶記)》에 따르면, 고려 초 기유년(己酉年, 949년 추정) 5월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교지가 해인사에 남아 있었다고 해, 949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됨.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며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함

 

 

비슷한 때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奉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가야산기(伽倻山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지정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 보존과학연구실의 과학 조사 결과,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고 후대의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제1919호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처럼 신라~고려 초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어서 희랑대사좌상의 제작시기를 유추하는데 참고가 된다.

 

* 건칠(乾漆): 삼배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든 기법으로,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이 요구됨.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유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존하는 예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음. 이 기법으로 만든 불상을 보통 ‘건칠불(乾漆佛)’이라 부름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선 시대에 조성된 ‘여주 신륵사 조사상’(驪州 神勒寺 祖師像, 1636년), ‘영주 부석사 소조의상대사상(榮州 浮石寺 塑造義湘大師像, 조선 시대)’ 등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생전(生前)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은 ‘흉혈국인(胸穴國人,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가슴에 작은 구멍(폭 0.5cm, 길이 3.5cm)이 뚫려 있는 것이다. 이 흉혈(胸穴)은 해인사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 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비슷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 보물 제1000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며, 제작 당시의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 값어치도 뛰어나다.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하였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ㆍ예술ㆍ학술 값어치가 탁월하다.

 

보물 제2079호 《간이벽온방(언해)[簡易辟瘟方(諺解)]》는 1525년(중종 20년) 의관(醫官) 김순몽(金順蒙), 유영정(劉永貞), 박세거(朴世擧) 등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돌림병(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왕명을 받아 전염병 치료에 필요한 처방문을 모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 뒤쳐(번역)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본이며 1578년(선조 11년) 이전 을해자(乙亥字)로 펴낸 것이다.

* 을해자(乙亥字): 1455년 을해년에 주조된 금속활자

 

 

책의 내용을 보면 병의 증상에 이어 치료법을 설명하였고, 일상생활에서 돌림병 유행 때 유의해야 할 규칙 등이 제시되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간이벽온방(언해)》는 ‘선사지기(宣賜之記, 왕실에서 하사했음을 증명해주는 인장)’가 찍혀 있고, 앞표지 뒷면에 쓰인 내사기(內賜記, 왕실에서 하사했음을 증명해주는 글)를 통해 1578년(선조 11)년 당시 도승지였던 윤두수(尹斗壽, 1533~1601)에 의해 성균관박사 김집(金緝, 1610~?)에게 반사(頒賜)된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는 이 책이 늦어도 1578년(선조 11년) 이전에 펴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반사(頒賜):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품 등을 내려줌

* 내사기(內賜記): 왕실에서 간행한 서책을 개인이나 문중에게 하사하면서 날짜, 담당자 등을 기록한 문구

* 내사기의 내용: “만력6년(1578) 정월 모일 성균관박사 김집에게 《간이벽온방》 1건을 내리니 임금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인사는 생략해도 좋음. 도승지 신윤(수결)” (萬曆六年正月日, 內賜成均館博士金緝簡易辟瘟方一件, 命除謝恩, 都承旨臣尹[手決])

 

이러한 기록 등을 토대로 《간이벽온방(언해)》는 현재까지 알려진 동종문화재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판본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전래가 매우 희귀해 서지학 값어치 또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 《간이벽온방(언해)》는 조상들이 현대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책일 뿐 아니라 조선 시대 금속활자 발전사 연구에도 활용도가 높은 자료인 만큼 보물로 지정해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물 제2080호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 屛風」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품으로, 선조 연간(1567~1608) 녹훈(錄勳)된 구공신(舊功臣)과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년) 11월 충훈부(忠勳府)에서 상회연(相會宴)을 연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 녹훈(錄勳): 공신들의 업적을 훈적(勳籍)에 기록하는 일

* 충훈부(忠勳府): 조선 시대 공신이나 그 자손을 우대하기 위한 사무를 담당한 관청

* 당시 상회연 개최는 《선조실록》 권181, 37년(1604) 11월 13일 자 기사를 통해 확인되며, 이때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 상회연에서 선온(宣醞, 임금이 내린 술)을 하사받은 것에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선조에게 올렸다고 함

 

 

상회연의 신ㆍ구공신은 모두 151명으로, 1590년(선조 23) 2월 1일 녹훈된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 42명과 1604년(선조 37) 6월 25일 녹훈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 109명을 말한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의 좌목(座目)에 적힌 공신들은 1604년 상회연 당시 생존해 있던 63명의 명단으로, 이 가운데 5명(이산해, 류성룡, 정탁, 이운룡, 남절)은 노환(老患)으로 불참했으므로, 실제 행사에 참석한 인원은 58명이다. 좌목은 공신 명칭, 문무관 품계, 자, 생년, 본관, 이름순으로 기재되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잘못 쓰인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는데 이바지한 공신

* 평난공신(平難功臣):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신

*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신

*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운 공신

* 청난공신(淸難功臣):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신

* 좌목(座目): 차례나 서열 자체를 의미하나, 보통 관리들의 모임에서 참석 명단 또는 명단을 적은 목록을 일컬음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모두 4폭으로 구성되었다. 오른쪽 제1폭은 상회연의 장면을 그린 것이고, 제2폭~제3폭에 걸쳐 참가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며, 제4폭은 위쪽의 제목을 빼고 내용은 비어 있다. 각 폭은 비단 2쪽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이어 붙였으며, 제2폭부터 제4폭까지 위쪽에 붉은 선을 그어 구획을 하고 그 안에 전서체로 제목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라고 적었다.

 

넓은 차양 아래 3단의 돌계단 위에서 공신들이 임금이 내린 술을 받는 장면이 가운데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 옆에서 음식을 화로에 데우는 모습 등 준비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 그려진 공신들의 숫자와 실제 참석자는 58명으로 일치하며, 위에서 내려 본 부감시(俯瞰視)로 특징만 포착해 선묘(선만으로 그림)로 간략하게 그린 점은 17세기 기록화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원경의 눈 덮인 설산(雪山)과 앙상한 나뭇가지 표현은 상회연 개최 시기인 음력 11월 상순이라는 계절감을 전달해 주며,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단정하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공신 관련 그림으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이라는 점, 제작시기가 명확해 기년작(紀年作, 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드문 17세기 회화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미술사적으로 의의를 지닌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값어치가 충분하다.

 

이번에 지정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등 가야 시대 목걸이 3건은 ‘철의 왕국’으로 주로 알려진 가야가 다양한 유리 제품 가공 능력도 뛰어나 고유한 장신구 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출토 정황이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좋으며 형태가 완전하여 역사ㆍ학술ㆍ예술 값어치를 지닌 보물로써 가치를 인정받았다.

 

* 가야인들은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 곡옥이나 둥근 옥을 만들어 목걸이로 착용했음. 구슬의 재질도 금, 은, 유리, 금박을 입힌 유리, 수정, 호박, 비취 등으로 다양함. 형태도 판옥(板屋, 편평하게 가공한 옥제품), 곡옥, 대롱옥(대롱처럼 기다란 형태의 옥제품), 다면옥(多面玉, 여러 면을 깎은 옥제품) 등 다채로운 것이 특징

 

보물 제2081호「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金海 大成洞 七十六號墳 出土 頸飾)」는 3세기 말~4세기 초 금관가야(金官伽倻) 시기 중요한 고분 중 하나인 김해 대성동 76호 고분에서 2011년 대성동고분박물관 발굴조사 때 목곽묘에서 발견되었다.

 

* 금관가야: 6가야(六加耶)의 하나로,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속했음.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조(五伽耶條)에 인용된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 유래되었으며, 가락국(伽落國; 駕洛國)이라고도 했으며, 초기에는 여러 가야 가운데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大加耶) 또는 본가야(本加耶)라고도 불렸음

 

*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3∼5세기 무렵 금관가야 시대 수장층(首長層)의 공동묘지. 한국고대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4세기 전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중한 고분임. 1991년 사적 제341호로 지정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서로 길이가 다른 3줄로 구성되었고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모두 2,473점으로 이루어졌으며, 평균 지름이 6~7mm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은 것으로 보아 여기에 깃들인 가야인들의 시간과 정성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마노(瑪瑙) : 수정과 같은 석영광물로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腦髓; 머릿골)를 닮았다고 해 ‘마노’라고 부름

 

맑고 투명한 수정과 주황색 마노, 파란색 유리 등 다종다양한 재질과 색감을 조화롭게 구성한 것이 특색이다. 유리를 곡옥(曲玉)이나 다면체 형태로 섬세하게 가공하고 세밀하게 구멍을 뚫어 연결하거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등 조형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 당시 유리세공 기술이 매우 우수했음을 보여준다.

* 구슬제작 방법: 고대 구슬 제작방법은 두 가지 종류가 있음. 하나는 주형(鑄型) 기법으로, 일정한 틀에 재료를 녹여 부어서 만든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잡아늘리기 기법’으로, 녹인 유리질 속에 막대를 넣고 잡아늘린 뒤, 식은 다음 일정한 크기로 자른 방식. 가야 시대 유리구슬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 만들었음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지와 유물의 내역이 분명하고, ▲여러 재료를 정교하게 가공해 색상과 질감을 조화롭게 배치한 가야인들의 수준 높은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 금관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공예품으로 역사ㆍ예술 값어치가 충분한 유물이다.

 

보물 제2082호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金海 良洞里 二百七十號 出土 水晶頸飾)」는 1992년 동의대학교박물관의 제2차 발굴조사 중 토광목곽묘에서 발굴되었다. 양동리 고분 270호는 인접한 여러 고분과 겹쳐 있어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으나 토기류와 철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고분으로 꼽힌다.

 

* 김해 양동리 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에 있는 철기시대 무덤군. 198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1990∼1996년의 기간 동안 동의대학교박물관에 의해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557기의 유구에서 5,1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여러 색의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이 다량 발견됨. 2004년 사적 제454호로 지정

 

 

‘김해 양동리 제270호분 출토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으며, 제작 시기는 고분의 형식과 부장품 등으로 보아 3세기로 추정된다.

 

영롱하고 맑은 투명 무색과 황색 및 갈색 등이 약간 섞인 은은한 색의 수정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형태와 크기가 다른 수정을 조화롭게 배치해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 목걸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정(水晶)은 한동안 외국산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학계의 연구를 통해 경상남도 양산(梁山) 등 우리나라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정목걸이는 3세기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의 장신구로서, 3∼4세기 가야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나, 이 목걸이처럼 100여 점 이상의 수정으로만 구성된 사례는 매우 희소하다. 또한, 가공 기법 또한 오늘날의 세공기술과 비교해도 될 만큼 완전성이 뛰어나 당시 수준 높은 기술과 세련된 미적(美的) 감각을 보여준다.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공예품으로서 기술ㆍ예술적 수준이 뛰어나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2083호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金海 良洞里 三百二十二號墳 出土 頸飾)」는 1994년 동의대학교박물관이 목곽묘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함께 발굴된 유물 중 중국 한대(漢代) 청동 세발 솥(청동정, 靑銅鼎) 등을 통해 3세기 경 축조된 금관가야 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경도 7의 단단한 수정(水晶)을 다면체로 가공하거나 많은 수량의 곡옥(曲玉) 형태로 섬세하게 다듬은 제작 방법은 가야인들의 기술적 면모를 보여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대까지 유행한 가야의 장신구는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로 곱은옥[曲玉]이나 둥근옥[球玉]을 만든 목걸이였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이러한 가야 구슬 목걸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투명한 수정을 육각형으로 다듬고 거기에 붉은색 마노와 푸른색의 유리옥을 더하여 영롱한 빛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는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지와 유물의 내역이 분명할 뿐 아니라 수정제 곡옥이나 대형 유리제 곡옥이 한꺼번에 발견된 희귀한 사례로서 중요하며, 수정을 정교하게 가공한 기술과 다채로운 색채와 질감이 조화를 이룬 조형의식이 돋보여 당시 장신구 문화의 세련된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3세기 금관가야의 지배층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귀중한 장신구로서 보물로 지정할 역사ㆍ예술 값어치가 충분하다.

 

이번에 지정된 가야 목걸이 3건은 각각 하나의 유적에서 일괄로 발견되었고 금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가운데 많은 수량의 구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에 해당하며, 이를 통해 가야인들이 신분적 위상과 지배 계층의 권위를 장신구를 통해 드러내었음을 실증적으로 말해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금ㆍ은 제품을 주로 다룬 신라, 백제인들과 달리 수정이나 유리구슬을 선호한 가야인들의 생활상과 연관이 깊은 작품으로, 화려함을 추구한 당시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존값어치가 높다.

 

*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의「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 기록 : “(가야인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혹은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ㆍ은ㆍ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