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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김동석, 파사디나 시 <로즈 퍼레이드> 주관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Don Kim, 김동석 교수가 상쇠로 코리안 퍼레이드를 이끌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L.A의 명물 <코리안 퍼레이드>는 1974년부터 현재까지 45년을 이어 오고 있는데, 그 중심에 풍물패가 있고, 김동석이 꽹과리를 치며 지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하나 1975년 말, 헐리웃 은막의 거리에서도 30만 인파의 환호 속에 크리스마스 시즌의 막을 올리는 행사가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을 때에도 그 주인공은 우리 풍물패였다는 이야기, 아마도 이민 역사상, 미 주류 사회에 소개된 첫 퍼레이드가 아닐까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1984년은 미국 LA올림픽이 개최되어 이와 관련된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4년 뒤에는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어서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내에 김동석이 이끄는 한국의 무용단이나 음악단, 풍물패 등이 알려져서 위상에 걸맞은 문화의 강국답게, 한국을 상징하는 전통음악과 춤이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L.A 올림픽이 개최되는 기간 내에 소수민족 예술단체 가운데서는 김동석이 이끄는 단체가 공식적으로 공연을 펼치도록 선정되어 있었기에 올림픽 기간 중에는 바쁜 공연 일정에 쫒기게 된 것이다.

 

개막식 참석 뒤에는 L.A에 있는 <일미(日美)극장>(Japan-American theatre)에서의 단독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선보일 주요 종목들 가운데는 여러 무용수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장고를 메고 추는 <장고춤>을 비롯하여 <북춤>이나 <가야금연주>, 민요 합창, 대금독주, 그리고 언제나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풍물굿 등이었다. 조용하면서도 때로는 화려한 프로그램들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관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화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인근 파사디나 시(市)에서 열리는 장미꽃 잔치, 곧 그 유명한 <로즈 퍼레이드> 이야기이다. 이 행사는 매년 1월1일에 열리는 축제로 생화만 사용하는 전통의 퍼레이드다. 꽃차 한 대를 장식하는 비용이 당시의 시가로 30만 달러(한화로는 약 3억 5천만 원 상당)이었으며 미국 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텔레비전중계가 되는 행진이다.

 

 

그러니까 세계인들이 즐기는 이 퍼레이드 역시 김동석이 주관해서 음악과 함께 꽃의 모양을 선정, 꽃차 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사디나 시(市)에서 행한 새해의 장미축제는 한국을 대표하고, 서울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행사도 김동석의 무용단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행진에 참가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사디나 시에서 열리는 장미축제나 매해 펼쳐지는 <한국의 날> 행진에는 특히 김동석의 무용단이나 풍물패가 중심되어 치러 왔다. 그러나 그 참가단원들이 고정적으로 적을 두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단체가 아니기에 김동석의 걱정은 행사 때마다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었다. 어린 학생들, 비전공 학생들과 함께 행진을 준비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남모르는 그의 하소연이 길게 이어진다.

 

“교포 행사 때에는 해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한 번도 북 장고를 쳐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 한복을 입어 본 일도 없는 교포 학생들을 모아서 함께 한 달 이상 연습을 한 뒤에 행사에 임해 왔어요. 하도 힘들고 어려워서 행사를 앞두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런 가운데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아요. 정말로 그만두자니 미국 내 한국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질 것 같은 걱정스러운 마음도 생기고... 1975년 이후로는 한국에서 많은 이민 학생들이 오게 되고, 특히 80년 이후에는 L.A시 정부의 도움과 한국일보 L.A지사의 협조로 학생들에게 여름 일자리 형식으로 용돈도 주게 되어서 우리 2세 3세들이 많이 참석하게 되었지요. 용돈도 벌고, 한국음악도 배우고, 행진도 참석해서 학교의 과외 행사 점수도 받게 되는 1석 3조의 행운을 2003년까지 누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후로는 예산 관계로 지원이 중단되고 모두 봉사로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 청소년 악대는 행사에 두 번씩 뛰게 했다. 처음에는 태극기를 앞세운 선발대와 함께 노란옷을 입은 구군악대 행렬을 시작으로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이 학생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풍물복을 갈아입고 상모 쓰고, 북, 장고 메고, 사물놀이 가락을 치면서 농기를 앞세우며 행진드의 대단원을 마감한다. 한때 올림픽 기간에서 세 번도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우리 구군악대와 풍물패 말고는 한국의 미를 보여주는 마땅한 볼거리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 것을 통해 이곳의 교민이 하나가 되는 중요한 행사가 바로 이 한국의 날 코리안 퍼레이드인 것이다. 처음 10여 명의 남학생으로 구성되었던 풍물패가 그 이후로는 매년 150여 명의 인원들이 <한국의 날>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올 2020년은 코로나 사태로 그 행사를 할 수 없었다.

 

김동석 교수는 자신이 20대 말에 시작한 행진을 70대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10대 청소년들과 함께 45년을 한결같이 뛰어온 것에 대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의 끈질긴 전통문화 지킴이로서의 노력은 많은 이민자로 하여금 더더욱 한국인의 긍지를 느끼게 하였고, 고국의 멋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겐 한국이 오랜 전통문화를 간직해 온 문화의 대국임을 알게 했다고 하겠다.

 

누가 김 교수에게 젊은 학생들과 길거리 행진을 함께 하라고 시키거나 부탁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로 묵묵히 그 긴 시간을 행진에 참여해 온 것이다. 늦었지만 그의 전통을 지켜가려는 노력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 그 정신에 진정어린 박수를 보낸다.(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