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 미
- 주장성
저의 잔을
늘 넘치게 부어 주시사
교만의 가시가 돋는 것을 몰랐습니다.
푸른 잎 하나
이슬 한 방울.
심히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기도합니다.
“수만 송이의 장미와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마치 내가 장미가 된 듯하다. 나이 들수록 두꺼워지는 것은 얼굴밖에 없는지 근거 없는 자존감만 높아지고 있다. 작은 키와 수영선수처럼 떨 벌어진 어깨, 다리가 불편해서 뒤뚱거리는 걸음까지 어딜 봐서 내가 장미를 닮았을까. 하지만 꽃이나 사람이나 저마다의 개성이 따로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미가 있는가 하면 키 작은 민들레나 제비꽃, 채송화도 자기만의 매력이 충분하지 않은가.”
수필가 서미애는 그의 수필 <장미가 있는 저녁에>에서 그렇게 읊조린다. 그렇다. 장미가 어디 똑같은 모습이런가? 어디 붉은 장미만 장미인가? 붉은 장미가 있는가 하면, 노랑, 파랑, 흰 장미들도 있다. 따라서 남이 볼품없다고 바라볼지라도 장미는 장미일 뿐이다. 스스로 교만의 가시가 돋아 있더라도 말이다.
주장성 시인은 “교만의 가시가 돋는 것을 몰랐다.”라고 했다. 장미 스스로 가시가 돋는 것을 안다면 그 장미는 철학자의 반열에 든 것 아닐까? 장미가 철학자일 필요가 어디 있나? 그저 꽃이면 되는 것이다. 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지 않았어도 장미는 장미다. 더더구나 신이 자신의 잔을 늘 넘치게 부어 주었기 때문이라면 어디 그게 장미의 잘못인가? 하지만, 주 시인은 “푸른 잎 하나 / 이슬 한 방울 / 심히 부끄럽습니다. / 엎드려 기도합니다.”라고 노래한다. 이미 철학자의 반열에 든 장미 주장성 시인이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