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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약광왕 무덤 성천원 (聖天院)

관동지역에 남아 있는 한국의 혼 <2>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고려신사 도리이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나있는 조붓한 길은 성천원 (聖天院)가는 길이다. 제법 넓은 마당을 낀 주택 몇 채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200여 미터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주차장이 나타나고 돌로 만든 듬직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 170년 역사를 지닌 고색창연한 성천원 산문

성천원 산문(山門)으로 일컬어지는 고색창연한 2층 산문은 170년 역사를 지닌 중후한 건물로 이 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가면 약광의 무덤으로 일컬어지는 작은 전각이 나오는데 전각 안에는 다중석탑(多重石塔)이 귀퉁이마다 마모된 채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서있다. 그 안쪽에는 고려왕묘(高麗王廟)라는 현판이 깊숙이 걸려있어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양광왕이 죽자 고려명신으로 맏들어

고마신사의 고려계도(高麗系図)에는 약광이 죽은 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성 외곽에 묻고 그 앞에 영묘(靈廟)를 세웠으며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약광왕 무덤은 초라했다. 아무렴, 막강하다는 수,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유감없이 늠름한 기상을 보여주던 씩씩한 고구려, 드넓은 중원 벌의 왕자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약광왕 무덤이 이렇게 초라할 수가 있겠는가 

 

   
▲ 성천원 앞에 있는 고려왕묘(高麗王廟)라는 현판이 달린 약광왕 묘

무덤이라기보다 무덤의 흔적이라고 해야 좋을 약광왕의 무덤을 돌아보자니 가슴 한 켠에 쏴한 슬픔이 전해온다. 용감무쌍하던 대강국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다시 써졌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고려왕 묘라고 쓰여 있는 작은 전각이 더 초라하고 가엾어 보였다.  

마모된 석탑만이 하소연할 길 없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뿐 사위는 고요한데 뒷산 고려산(高麗山) 까마귀만 알 수 없는 울음소리로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약광왕 묘 바로 입구에 전 총리 김종필 씨의 글씨로 고구려약광왕릉(高句麗若光王陵)이라는 비문을 새긴 초등학교 아이 키만 한 검은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마신사 방명록에도 그렇고 성천원에도 한국의 정치인들이 다녀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멸망한 나라의 왕릉은 그 흔적도 없으나 그 혼을 기리는 곳은 이역만리 일본 땅 곳곳에 남아 있어 찾는 이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우리는 무덤을 벗어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다. “성천원 관리 기금으로 돈을 받는다.”라며 300엔의 입장료를 받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는 성천원 안에 뭐가 있느냐?”라는 일본인 방문객의 질문에 우물쭈물 답을 못한다.  

우리야 고구려 혼을 찾아 불원천리 고마신사와 성천원을 찾아왔지만 일본인들은 입장료 300엔에 합당한 볼만한 것이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대한 역사성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관리 할머니가 건네주는 성천원 입장권 뒷면에는 빼곡하게 성천원에 대한 유래가 적혀있다.

   
▲ 성천원 본당 앞마당 난간에 서면 멀리 히다카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성천원 본당자리가 높은 자리에 세워진 탓인지 제법 많은 돌계단을 오르니 히다카시(日高市)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천원은 나라시대(奈良時代)에 고구려에서 건너간 승려 승낙(勝楽)이 약광의 명복을 빌기 위한 기도절(菩提寺)로 지은 것이다. 본당 건물은 승낙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그의 제자이자 약광의 셋째 아들 성운(聖雲)이 승낙의 유지를 받들어 완성했다 


성천원 본당, 2000년에 말끔한 현대식 건물로

그러나 이 건물도 오래지 않아 불타서 없어지기를 반복한데다가 억새풀로 지붕을 엮은 초가집형 본당인지라 낡고 노후화된 것을 7년 공사 기간을 거쳐 2000년에 말끔한 현대식 본당으로 세웠다. 성천원은 에도시대까지도 고구려군(高麗郡)의 본사(本寺)54개의 말사를 두었으며 원주(院主) 격식은 제후에 따른다.”라고 할 만큼 융성했다고 성천원 입장권에는 기록되어있다. 

   
▲ 초가 상태에서 뜻있는 기부자의 기부금으로 새 단장을 한 성천원 본당

여기서 거제도 출신 재일교포인 윤병도라는 인물을 지나칠 수 없다. 성천원을 오르는 계단 맨 아래쪽 돌에 윤병도라는 이름과 거제시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이 사람이 다 쓰러져 가던 성천원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인터넷 모닝뉴스” 2008101일자에 보면, “이곳 성천원은 고구려가 패망하여 망명한 유민 1,799명이 716년 무사시 지방으로 이주하여 최초로 정착한 곳으로 재일동포 윤병도씨가 거금의 사비를 들여 고마산(高麗山)의 성역화를 위해 승낙사(勝樂寺, 쇼오라쿠지) 자리에 일본에서도 보기 드물게 웅장한 성천원을 건립하여 우리 백의민족의 얼을 일본 땅에서 되살리고 있다. 성천원에는 대형 단군임금의 조각상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시대별 인물 동상이 서 있으며 일제 35년간 희생된 무연고 위령탑이 자리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윤병도 씨는 거제시 신협읍 문동리에서 태어나, 20세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특유의 근면과 검소함으로 토건업 분야에서 재산을 모았으며 일본 사이타마현 치치부시의 주변 산과 땅을 사서 33580(10만 평)나 되는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여 청소년 야영장 등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사회환원 사업으로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다.”라고 인터넷신문 에코저널” 2010126일 자도 그의 나라사랑 실천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00엔짜리 입장권 뒷면에 있는 성천원 안내글에는 윤병도 씨의 이러한 선행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는 윤 씨의 바람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오늘날 번듯한 성천원의 탄생이 있기까지 한국인 윤병도 씨가 한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성천원 안내글에 그 이름이 없는 게 못내 서운하다 

   
▲ 소나무 동산 앞에 세워져있는 고구려 약광왕 동상

성천원 본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작은 돌계단을 오르면 고구려왕 약광의 동상이 서 있다. 예리하면서도 절도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한 약광왕 동상 앞에 선 회원들은 마치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라도 만난 양 동상을 끌어안거나 손을 잡는 등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차가운 화강석 동상이었지만 어루만지는 손은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움이 크면 차디찬 화강석도 따스하게 느껴지는 이 원리는 겨레의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리라. 동상 하나 풀 한 포기,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조차 우리는 놓치지 않고 가슴에 담아 왔다.

 
! 고구려 약광왕이시여!  

동상을 뒤로하고 몇 발자국 걸어 나가면 성천원 건너편에 재일한민족 무연불 위령탑(在日韓民族無縁仏慰霊塔)이 시야에 들어오나 이곳을 가려면 다시 성천원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들어서야 갈 수 있다. 이 위령탑은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와 숨져간 수많은 재일동포의 원혼을 달래려고 세워진 탑이다. 석탑 주변에는 단군을 비롯하여 광개토대왕, 태종무열왕, 정몽주, 왕인박사, 신사임당 등 조선의 대표적인 인물상이 놓여있으며 단청이 고운 팔각정자가 놓여있다. 

   
▲ 성천원 뒤쪽에 있는 무연불위령탑

팔각정자는 탑골공원 안의 팔각정자를 상징적으로 재현해 놓은 것으로 모든 재료는 한국의 재료를 썼다고 한다. 죽어서나마 고국의 정자를 볼 수 있고 위인들을 만나게 해준 거제도 출신 윤병도 씨는 이역 땅에서 눈감은 외로운 영혼들의 영원한 등대로 남을 것이다.